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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craps and pieces

[B]

  • Brontes and Wolf

 버지니아 울프는 1925년 평론집 [보통의 독자]에서 처음으로 샬롯과 에밀리 브론테 자매에 대해 논한다. '샬롯 브론테가 태어난 지 100년이 지났지만,' 이라는 구절로 시작하는 이 평론에서 1882년생인 버지니아 울프는 1800년대 초에 태어나 모두 요절한 브론테들의 재능에 찬사를 보내면서도 특별히 개인적인 감정을 품고 있지는 않는 듯 하다. 아버지 레슬리 스티븐의 친구이자 인척이었기에 헨리 제임스나, 새커리, 토머스 하디 등의 작가들을 일종의 확장된 아버지로 느꼈던 것과는 사뭇 다른 태도. 하지만 버지니아 울프와 브론테들의 인연 역시 사실은 더 오래 전부터 시작되었을지도 모른다. 정확하게는 1857년부터. 버지니아 울프가 태어나기 31년 전, 소설가 엘리자베스 개스켈은 친구였던 샬롯 브론테의 전기를 출간한 후 곤경에 처한다. 브론테들의 유일한 남자 형제였던 브란웰 브론테의 파란만장한 인생을 다룬 부분 때문이었다. 그는 살아 생전 고용주였던 로빈슨 부인에게 유혹을 당한 후 사랑을 고백했지만 버림 받았고, 가정교사 자리에서도 해고를 당한 탓에 자신의 삶이 엉망이 되었다는 주장을 하곤 했는데, 이것이 사실인지 아니면 알콜중독자의 변명인지는 알 수 없다. 하나같이 예리했던 브론테들이 그의 말을 어디까지 믿었는지도 확실하지 않다. 기록을 통해 알 수 있는 것은 엘리자베스 개스켈이 그 주장을 그대로 받아들였고, 로빈슨 부인은 법적 조치를 취했다는 사실 뿐. 로빈슨 부인의 일종의 법적 대리인 자격으로 강경한 경고의 편지를 보낸 사람은 제임스 스티븐 경인데, 지금이야 브론테들이 훨씬 더 유명하지만 당시만 해도 노예제 폐지 등에 관여하며 변호사로서 긴 경력을 쌓은 그는 쉽게 무시할 수 있는 사람이 아니었다. (엘리자베스 개스켈은 결국 개정판을 내놓아야 했다.) 그리고 이 제임스 스티븐 경은 다름 아닌 버지니아 울프, 결혼 전에는 스티븐이었던 아델린 버지니아의 할아버지일 가능성이 높다. 흔한 이름이고, 명확하게 참고할 만한 문헌은 없지만 사망년도와 활동 시기, 직업, 작위 등을 참고해보면 쉽게 유추할 수 있다. 버지니아 울프도 자신의 완고한 할아버지가 손수 결혼 증서를 써 준 친구 딸의 명예를 위해 이미 죽은 브론테들에게 열렬하게 반박한 적이 있음을 알고 있었는지는 알 수 없다. 아버지 레슬리 스티븐처럼 계승이라는 주제에 관심이 많았고 가족과 친지들을 작품 속 인물의 모델로 자주 삼았던 작가인만큼 남은 기록이 없는 걸 보면 몰랐거나, 알아도 흥미를 느끼지 못한게 아닐까 짐작만 가능하다. 제임스 스티븐 경이 손녀의 관심을 그다지 끌지 못 했다고 해도 놀랍지는 않다. 그는 굳센 의지와 과도한 민감함이라는 양면성을 조화시키지 못 해 평생 내적 갈등에 시달린 나름대로 매우 특이한 사람이었지만 스티븐들은 모두 그랬으며, 버지니아 울프의 미쳤거나 비범한 사촌들과 형제, 고모 삼촌들 사이에서 그는 상대적으로 매우 평범해 보인다.


[C]

  • Capote and Salinger

트루먼 카포티가 야심찬 10대 시절 잡지 [뉴요커]에서 일하다 시인 로버트 프로스트의 심기를 거스르는 바람에 해고된 얘기는 유명하다. [뉴요커]에서 트루먼 카포티의 역할이 무엇이었는지는 정확하게 남아 있지 않지만 중요한 직책은 아니었던 것 같다. 이름 없는 새파랗게 젊은 잡지 직원이 자신의 시 낭독을 들으러 오지도 않고, 듣다가 나가버리기까지 하자 (카포티의 변명을 해보자면 그는 당시 독감을 앓고 있었다고 하는데) 분개한 로버트 프로스트가 다음 날 [뉴요커]에 항의 전화를 하자 받은 사람이 '트루먼 카포티가 근데 대체 누구야?'라고 어리둥절해했다고 하니. 훗날 못지 않게 유명한 작가가 된 카포티는 자신의 글솜씨를 십분 발휘해 이 유명한 시인의 성격에 대한 정교한 악평을 남겼다. 누구 하나 다친 것도 아니니 언제 들어도 재미있는 일이다.

자전적인 얘기를 즐겨 쓰는 작가들이 으레 그렇듯이 빼어난 글솜씨 만큼이나 허풍도 곧잘 떨었던 카포티의 뉴요커 에피소드는 이게 끝이 아니다. 그는 한 때 [뉴요커]의 슈퍼스타였던 J.D. 샐린저가 65년 마지막 글래스 아이들 이야기를 써낸 후 몇 번이나 다른 작품들을 제출했지만 거절 당했다는 이야기를 인터뷰에서 하곤 했는데, 어떤 버젼에서는 심지어 자신이 사환으로 일하던 시절 샐린저와 절친했던 전설적인 [뉴요커]의 편집장이 전화로 거절하는 걸 직접 들었다고 장담을 했다. 그러나 대부분의 관계자들이 이는 사실일 리가 없다고 일축하는데, [뉴요커]의 사람들은 결국 예술가가 아니기 때문에 샐린저를 충분히 거절할 수도 있었다는 카포티의 비판과는 달리 [뉴요커] 측에서는 샐린저의 작품은 뭐가 됐든 어떻게든 출판하려는 입장이었다고. 하지만 실제로 65년에 샐린저가 세상에 내놓은 마지막 글래스 아이들 단편은 매우 차가운 침묵 속에서 잊혀졌고, 작가가 이에 크게 상심했다는 것도 정설이기에 어느 쪽의 말이 사실인지는 알 수 없다. 다만 [뉴요커] 측에서 샐린저의 작품을 실제로 거절했다고 해도, 짧은 기간 동안 사환으로 일하다 해고된 카포티가 그런 중요한 전화를 한 방에서 엿들었을 법하진 않다. 물론 그냥 어디선가 전해 들었다는 것보다는 카포티의 드라마틱한 버전이 더욱 재미있긴 하다.  은둔자의 삶을 택한 사람 치고는 자신에 대한 소문들에 지나치게 관심이 많았고, 자신이 '버리고 떠난' 문학계에도 평생 관심이 지대했던 샐린저도 이제는 유명인사가 된 카포티가 자신의 이름을 떠들고 다닌다는 건 알고 있었던 것 같다. 그는 오래 알고 지낸 작가 친구에게 자신은 평생 한 번도 그 짜증나는 트루먼 카포티를 만난 적도 없는데 그쪽에서는 여러 '미친 사람들'에게 자신과 친분이 있는 척을 하고 다닌 바람에 많은 사람들로부터 카포티가 안부를 전한다는 인사가 적힌 편지를 받아야 했다는 신랄한 말을 남겼다. 


[P]

  • Peter Pan and not so lost boys
아서 르웰린 데이비스와 그의 다섯 아들
아서 르웰린 데이비스와 그의 다섯 아들

작가 J.M. 배리가 이웃의 다섯 형제를 모델로 [피터 팬]을 만들었다는 이야기는 유명하다 못 해 [파인딩 네버랜드] 같은 감상적인 영화로도 만들어져 있지만 실화에 바탕한 많은 영화들이 그렇듯 이 작품도 여러 부분을 생략하고 있다. 배리를 자애로운 친구/또 다른 아버지로만 그리려면 필요한 과정이었겠지만 가장 눈에 띄는 생략은 형제들의 가족관계인데, 사실 이 다섯 형제는 영화에서처럼 고립되어 있지는 않았다. 그들은 지적인 법조인들과 종교인, 사회 운동가를 많이 배출한 아버지의 가족과 예술적 기질이 풍부했던 어머니의 가족들 모두와 긴밀하게 연결되어 있었다. J.M. 배리가 처음 이들에게 관심을 보이게 된 계기도 파티에서 만난 형제들의 어머니 실비아가 조지 듀 모리에의 딸임을 알았기 때문이라고 많은 연구자들이 짐작한다. 조지 듀 모리에는 가난한 예술가로서 젊은 시절을 파리에서 보낸 후 영국에 돌아와 삽화가로 점차 명성을 얻은 인물로, 숙련된 최면술사이자 소설가로서, 그리고 풍자 잡지 [펀치]의 삽화가로 풍족한 삶을 살았다. 실비아는 그가 가장 좋아했던 딸이었고 아버지의 소설 속 주인공의 모델이기도 했기에 조지 듀 모리에의 팬이었던 배리에게는 매혹적으로 다가왔을 게 틀림없다. 실비아는 배리와의 첫 만남에서 고인이 된 아버지를 기리기 위해 세 아이 조지, 잭, 피터의 이름을 모두 외할아버지의 소설 속 인물들에게서 따왔다는 사실을 알려줬다고 전해진다.

제랄드 듀 모리에와 딸 대프니 듀 모리에
제랄드 듀 모리에와 딸 대프니 듀 모리에

조지 듀 모리에보다 우리에게 더 익숙한 듀 모리에는 [레베카], [나의 사촌 레이첼] 등 빼어난 심리적 묘사를 자랑하는 고딕 호러 소설의 작가 대프니 듀 모리에일텐데, 그는 조지 듀 모리에의 손녀였고 피터 팬의 모델이 된 다섯 형제와는 외종 사촌이었다. 젊은 시절 최면술을 통한 무의식의 탐구에 심취했던 조지 듀 모리에의 영향은 대프니 듀 모리에의 작품에서도 뚜렷하게 느껴진다. 대프니 듀 모리에의 아버지이자 실비아의 오빠였던 제랄드 듀 모리에 역시 [피터 팬] 이야기에서 빼놓을 수 없는 인물로서, 그는 연극 무대에서 최초로 후크 선장을 맡은 배우였고, 너무나 훌륭하게 소화해 감명을 받은 배리가 그의 제안대로 대사를 바꾸기도 했다고. 주인공 아이들의 아버지인 달링 씨와 후크 선장을 같은 배우가 연기하는 전통 역시 제랄드 듀 모리에에서 시작된 것. 배리와 제랄드 듀 모리에는 서로 비판적이면서도 협력적인 관계를 유지하며 많은 작품을 함께 했다.

여성 노동 조합에서 비서와 일하고 있는 마거릿 르웰린 데이비스오랫동안 자신이 결성한 조합을 이끌면서도 그는 은퇴할 때까지 한 번도 월급을 받지 않았다고 한다
여성 노동 조합에서 비서와 일하고 있는 마거릿 르웰린 데이비스오랫동안 자신이 결성한 조합을 이끌면서도 그는 은퇴할 때까지 한 번도 월급을 받지 않았다고 한다

아이들의 아버지 쪽인 르웰린 데이비스 가문에도 주목할 만한 인물은 많았다. 아이들의 할아버지인 존 르웰린 데이비스는 여성의 참정권과 노동자의 권리를 강하게 옹호하는 급진적이고 진보적인 사상을 가진 목사였고 이런 성향 때문에 빅토리아 여왕의 눈밖에 나 성공이 보장된 자리에서 쫓겨난 양심적인 지식인이었다. 예술적이고 보헤미안적인 듀 모리에들과는 달리 르웰린 데이비스들은 좀 더 엄숙하고 진지하며 정치적인 인물들로 보인다. 존의 여동생인 에밀리 데이비스는 여성을 위한 최초의 대학인 거튼 칼리지를 설립했고, 첫째 아들인 아서 르웰린 데이비스는 영화 [파인딩 네버랜드]가 보여주듯이 피터 팬 전설에서 잊혀졌지만 다섯 아이들의 자상한 아버지이자 장래가 촉망받는 젊은 변호사였다. 그의 형제 크롬턴 데이비스는 아일랜드와의 평화 조약을 작성했으며, 아서의 여동생이자 아이들의 고모였던 마가렛 르웰린 데이비스 역시 참정권자이자 여성 노동자 조합을 조직해 그들의 권리 보호에 앞장선 걸출한 인물이었다. 어디를 봐도 외로운 집안은 아니었다.

아서와 실비아가 잇달아 사망하는 비극이 벌어졌을 때도 위에 언급된 삼촌 및 고모, 조부모들은 몇 명을 제외하고는 모두 살아있었다. 이들이 왜 다섯 아이들의 양육권을 가지지 못 했는지에 대해서는 많은 배리 연구가들도 합의를 보지 못하는 부분. 당대 최고의 작가로서 엄청난 부자였고 가족보다 더 가까운 이웃이었던 배리가 다섯 아이를 찢어놓지 않고 한 번에 맡을 수 있는 유일한 인물이었기에 그의 선의가 아이들을 구했다고 보는 입장이 있는가 하면, 아버지인 아서가 다소 껄끄러워했을 정도로 데이비스 가족에게 집착이 심했던 배리의 소유욕의 발현된 결과라고 보는 쪽도 있다. 그후 데이비스 형제들에게 닥친 비극이 워낙 많다보니 (첫째인 잭은 일차대전 중 사망, 넷째인 마이클은 캠브릿지 재학 중 다른 학생과 함께 익사했는데 연인과의 동반 자살로 추정되며, 셋째 피터는 출판사를 경영하면서 사촌 대프니 듀 모리에의 책을 출간하기도 했는데 가족들의 이야기를 정리하던 중 60대의 나이에 자살했다.) 어두운 해석이 매혹적으로 느껴질 수 있지만 대부분의 실화들이 그렇듯 이런 일의 원인을 뭐라 딱 잘라 집어낼 수 없으며, 픽션이 아닌 실존 인물들의 인생은 스캔들처럼 다루면 안 되기에 결론은 내리지 않는다. 더 자세한 얘기를 알고 싶은 분들은 배리 연구서들을 읽어보면 되겠다. 내가 참고한 책들은 [Hide-and-Seek with Angels : A Life of J.M. Barre]와 [The Real Peter Pan]이다.

브론테 자매들과 마찬가지로 버지니아 울프는 이들과도 인연이 있었다. 빅토리아 시대의 대표 지성인으로서 발이 넓었던 레슬리 스티븐은 아이들의 외할아버지인 조지 듀 모리에와 후원가 J.M. 배리 모두와 알고 지냈으며, 아서 르웰린 데이비스의 또 다른 형제로서 아이들의 삼촌이었던 테어도어 르웰린 데이비스는 캠브릿지의 유서 깊은 비밀 클럽 [사도회]의 멤버로서 버지니아의 오빠 토비 스티븐과 후에 형부가 되는 클라이브 벨과 같은 사회적 서클에 속한 사이였다. 사도회는 토비의 주도로 대학 밖에서도 연을 이어갔으므로 스티븐 자매들은 테어도어를 분명히 알고 지냈을 가능성이 높다. 여성들과의 관계는 좀 더 직접적이었다. 테어도어 르웰린 데이비스는 실연으로 받은 상처 때문에 자살을 했다고 추정되는데, 그를 사랑했고 그의 죽음에 큰 상처를 받았던 여성 권리 운동가인 메리 시프스생크스는 버지니아 울프를 노동자를 위한 개방 교육기관인 몰리 대학에서 강연하도록 추천한 인물. 메리 시프스생크스와 그녀의 좌익적이며 정치적인 여성 운동가 친구들과 버지니아의 관계는 대체로 우호적이면서도 때로 조롱과 상호 비판이 섞여 상당히 복잡했다. 데이비스 형제들의 고모인 마거릿 르웰린 데이비스 역시 이들 중 한 명이었는데 원래 여성 참정권에 반대했던 버지니아 울프의 남편 레너드 울프는 그가 결성한 여성 노동 조합을 보고 페미니스트이자 사회주의자로 나아갈 수 있었다고 회상한다. 두 사람의 정치적 협력과 우정에 복잡한 마음을 느꼈지만 마가릿 르웰린 데이비스의 열정에 감명을 받았던 버지니아 울프는 그 후 오랫동안 그와 관계를 유지하는데, 좌파 사회 운동가와 모더니스트 예술가 사이의 간격은 멀어질 때도, 가까워질 때도 있었다. 다소 상호 비판적이었던 두 사람은 늘 편한 관계를 유지하진 못 했지만 여성의 독립을 위해서는 경제력이 뒷받침되어야 한다는 주장이 강하게 깔려 있는 버지니아 울프의 [3기니]와 [자기만의 방] 등은 분명히 그가 '스팀 롤러도 춤추게 할 수 있을 것'이라고 감탄했던 맹렬한 여성 운동가들의 영향을 강하게 받은 작품들이었다. 

written word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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