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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뭐 읽지? (2)

#2018_여성작가 (5-9월)

  [5월]

  • [면역에 관하여]  - 율라 비스

정원의 은유를 우리의 사회적 몸으로까지 확장하면, 우리는 자신을 정원 속의 정원으로 상상할 수 있다. 이때 바깥쪽 정원은 에덴이 아니고, 안락한 장미 정원도 아니다. 그 정원은 몸이라는 안쪽 정원, 그러니까 우리가 <좋고> <나쁜> 균류와 바이러스와 세균을 모두 품고 있는 곳 못지않게 이상하고 다양한 곳이다. 그 정원은 경계가 없고, 잘 손질되지도 않았으며, 열매와 가시를 모두 맺는다. 어쩌면 우리는 그것을 야생이라고 불러야 할지도 모른다. 혹은 공동체라는 말로 충분할지도 모른다. 우리가 사회적 몸을 무엇으로 여기기로 선택하든, 우리는 늘 서로의 환경이다. 면역은 공유된 공간이다. 우리가 함께 가꾸는 정원이다.

 이 책을 읽기 전 면역이라는 단어는 예방 접종의 부작용을 염려해 접종을 거부하는 유행이나 외부로부터 나를 보호해주는 방패나 보호막을 떠올리게 했지만 이제는 아니다. 율라 비스의 사려 깊은 글이 나와 타인이 따로 존재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 서로의 환경이라는 것을 깨닫게 해주었기 때문. 자자한 명성만큼이나 아름다운 책으로 호프 자런의 [랩 걸]이나 다이앤 애커먼의 책을 재밌게 읽은 사람이라면 누구나 좋아할 만한 작품. 나처럼 과학에 흥미는 있지만 잘 알지는 못하는 독자들도 쉽게 이해할 수 있도록 쓰여졌다는 점도 큰 장점이다. 

  • [설득], [맨스필드 파크] - 제인 오스틴

 5월은 생활에 너무 많은 변화가 있어 잠깐이나마 새로운 책은 손에 들고 싶지 않았다. 이럴 때면 나는 언제나 제인 오스틴의 책을 다시 읽으면서 안정을 찾는데, [설득]과 [맨스필드 파크]는 특히나 주인공이 겪는 삶의 큰 변화와 거처의 이동을 주제로 하고 있어 마음 정리에 도움이 되는 작품들. 두 책 모두 제인 오스틴이 인생의 후반기에 완성한 소설로 그의 다른 모든 소설처럼 행복한 결말을 갖고 있지만 [오만과 편견] 같은 초기작보다는 좀 더 원숙한 씁쓸함이 가미된 점이 큰 매력이다. 두 작품의 자세한 내용과 배경에 대해서는 오래 전에 시작했지만 아직도 마무리를 짓지 못 하고 있는 제인 오스틴을 주제로 한 시리즈 글에서 다시 얘기해 볼 예정.

  • [그릿] - 앤젤라 덕워스

작년에 내가 가장 인상 깊게 읽었던 논픽션이 내향성을 다룬 수전 케인의 [콰이어트]라면 올해는 끈기를 다룬 [그릿]. 대기업 컨설팅 회사에서 일하다 교직으로 옮긴 앤젤라 덕워스는 교실에서의 경험을 바탕으로 성공하는 이들의 공통점이 지속적인 노력이라는 가설을 세우게 된다. [그릿]이 다른 수백권의 책들과 구별되는 부분은 노력이 중요하다는 일반론을 당연하게 받아들이지 않고 방대한 연구를 통해 증명해야 하는 새로운 이론처럼 취급하는 태도. 엄격한 아버지로부터 천재는 아니라는 말을 듣고 실망했던 기억이 있다는 말로 책을 시작한 앤젤라 덕워스는 엘리트 군인을 양성하는 웨스트포인트 사관학교부터 풋볼 팀까지, 자신의 이론을 시험해볼 수 있을 만한 곳은 어디든 방문하는 집요함을 보여주며 노력이라는 단어에 회의적인 마음부터 들 독자의 마음을 사로잡는다. 주장하는 바에 모두 동의하지는 않더라도 자신의 연구에 임하는 저자의 자세에 영향을 받지 않을 수 없는 책. [그릿]은 짧게 요약하기는 어려운 책이지만 모든 방면에서 완벽한 끈기를 가져야 한다고 주장하지는 않는다. 오히려 안젤라 덕워스는 모든 면에서 성공하고자 하는 마음을 버리고 소수의 목표를 추려내는 것을 첫 단계로 제시하며 그 후에 지속적일뿐만 아니라 의식적인 노력을 하는 법을 가르쳐준다. [그릿]을 읽고 내가 좀 더 끈기있는 사람이 되었는지 생각해봤는데 예전 같았으면 한 해에 읽은 책을 늘 반 정도만 정리하다가 나가떨어졌을 텐데 올해는 꾸준히 하고 있으니 끈기는 기를 수 있다는 말이 어느 정도는 맞는 거겠지. 

  • [이상한 정상가족] - 김희경

저자 김희경은 [이상한 정상가족]을 통해 한국의 아동 인권이 갈 길이 얼마나 먼 지를 잘 보여주었지만 나는 역설적으로 희망을 느꼈다. 문제를 해결하겠다는 굳은 의지를 가진 사람이 등장한 것을 보니 안도감이 들었기 때문. 가정 폭력과 아동 인권 침해를 다문화주의적 관점에서 그 나라 고유의 관습으로 이해하려는 시도를 단호하게 거부하며 실제로 적용 가능한 해외의 법적 제도들을 참고할 만한 사례로 제시하는 매우 인상적인 책. 살면서 누군가에게 폭력을 휘두른 적이 없고 심각한 가정 폭력의 피해자가 된 적도 없기 때문에 굳이 읽어볼 필요가 없다고 느껴진다면 이건 어떨까. 살면서 단 한 번이라도 '나도 맞고 자랐지만 잘 컸다', '잘못했으면 맞아야 된다'고 생각하거나 농담으로라도 말해 본 적이 있는지? 그렇다면 당신도 이 책을 꼭 읽어봐야 한다. 

[6월]    

  • [마쿠라노소시] - 세이쇼나곤

 나는 일본 고전 문학에는 문외한이라 심지어 [겐지 이야기]도 단 한 편도 읽지 않았다. 여러 작품의 배경으로 인기 높은 헤이안 시대에도 별 다른 매력을 못 느꼈던 터라 [마쿠라노소시]를 처음 접하고 받은 충격은 대단했다. 작가인 세이쇼나곤이 [겐지 이야기]를 쓴 무라사키 시키부와 동시대인이었을 뿐만 아니라 경쟁 관계이기도 했다는 짧은 소개부터가 눈을 사로잡았는데, 여성이 사회적 존재로 인정받기 힘들었던 시절이었음에도 후대에 이름을 날릴 정도로 빼어났던 여성 작가가 두 명이나 궁에 함께 있었다니. 고도로 장식적인 귀족 문화로 유명한 헤이안 시대에도 이렇게 내 흥미를 끌 만한 구석이 있을 줄은 정말 몰랐다. [마쿠라노소시]는 놀라울 정도로 솔직하고 자신만만한 어조로 쓰여진 글들의 모음집으로서 작가 고유의 목소리가 뚜렷하게 느껴지는 대담한 작품. 느긋하고 쾌활한 어조로 태평성대를 노래하는 이 수필집이 사실은 상당히 정치적인 목적을 갖고 있다는 분석 역시 매우 흥미롭다. 데이시 후궁이 천황비였던 시절 그를 모시는 고위 궁녀였던 세이쇼나곤은[마쿠라노소시]에서 즐거운 시절만을 다루는데, 이는 정적의 눈치를 본 탓도 있겠지만 집안이 몰락한 후 25세의 이른 나이에 세상을 뜬 천황비를 전성기 모습으로만 남겨두려는 의도가 강하다는 것이 일반적인 의견. [마쿠라노소시]속에서 느껴지는 세이쇼나곤의 무신경할 정도로 태평한 귀족적인 태도와 그 밑을 흐르는 진지한 충성이 이루는 대조는 묘하게 감동적이다.

  • [브론테 자매와 가정교사 소설], [19세기 영어권 여성문학론],  [19세기 영국 여성작가 읽기]

이 책들은 LIE 영문학총서 시리즈의 일부다. 찾아보니 2014년까지 여러 주제로 꾸준히 출간되어 있는데 나도 한참을 엉뚱한 곳에서 찾다가 가까운 동네 도서관에서 발견했으니 궁금한 분들은 도서관부터 뒤져보시길. 연구서이긴 하지만 일반 독자가 이해하지 못할 수준은 아니고 19세기 영국은 여성 독자들이 어린 시절부터 좋아했던 작가들을 많이 배출했던 시기라 익숙한 작품들이 많이 나온다. 내가 지금 소개하는 세 권만 해도 브론테 자매과 제인 오스틴, 메리 셸리, 그리고 조지 앨리엇을 모두 다루고 있었는데 자주 접했던 다른 작가들에 비해 읽어볼 기회가 적었던 조지 엘리엇의 방대한 작품 세계가 특히나 흥미로웠던 부분. 내가 10대 때만 해도 [플로스 강의 물방앗간] 정도만 소개되어 조지 엘리엇은 포기했던 기억이 남아있는데 안 찾아 본 사이 [다니엘 데론다]며 [미들 마치], [아담 비드]까지 모두 번역되어 있었다. 남은 2018년에는 조지 엘리엇을 읽어볼 생각.

  • [아킬레우스의 노래] - 매들린 밀러

 혜성같이 등장한 신예 매들린 밀러의 데뷔작 [아킬레우스의 노래]는 그리스 로마 신화를 읽으면서 화가 나서 주먹을 휘둘러 본 어린 시절의 경험이 있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매혹될 수 밖에 없는 작품. 책 좋아하는 아이들이 누구나 그렇듯 나도 어린 나이에 그리스 로마 신화를 접했지만 지금 생각해도 참으로 혹독한 내용이다. 특히 여자아이라면 여자들이 끝없이 끔찍한 일을 당하면서도 죽어 이름이 남는 영웅이 될 기회조차 받지 못하는 걸 봐야 하는데 인간의 운명을 결정짓는 신들은 대체로 더 지독한 존재들이라 축복은커녕 관심을 끌지 않는 게 최선이라고 느껴질 뿐 아닌가. [아킬레우스의 노래]가 재미있는 점은 독자가 신에게 질 수 밖에 없는 인간의 결말을 이미 알고 있음에도 인간의 입장에서 함께 싸우기를 택한 다시 쓰기라는 것이다. 매들린 밀러는 많은 학자들이 영웅 아킬레우스의 연인이었으리라 짐작하나 목소리가 전혀 남아있지 않은 인간 파트로클로스를 주인공으로 삼아 숙명에 맞서는 인간이라는 고전적인 주제를 매우 휴머니스트적인 관점에서 풀어낸다. 아킬레우스와 파트로클로스가 소년에서 청년으로 함께 성장하며 사랑에 빠지는 과정은 뛰어난 퀴어 성장기며, 아킬레우스의 어머니인 님프와 그의 아이를 낳은 공주, 그리고 아킬레우스의 노예로만 기억되는 트로이인 여성이 자신만의 동기와 감정이 있는 존재로 되살아나는 부분도 여성 작가의 의도가 뚜렷하게 엿보이는 부분. 

  • [1인 가구 살림법], [1인 가구 돈 관리]  - 공아연

일상생활에 필요한 조언들을 책은 많지만 선뜻 따라하게 되는 겅우는 드문데 [1인 가구 살림법]은 읽자마자 당장 해보고 싶어지는 내용들이 잔뜩 있었다. 제품을 소개하는 경우 이름이 정확하게 나와 있고 이 정도는 상식적으로 알겠죠, 라는 식으로 대충 넘어가는 부분 없이 꼼꼼하게 기초부터 알려줘서 용기와 자신감을 주는 책. 책을 산 지 3개월이 넘은 지금 저자가 소개해 준 내용 중 시도해 보지 않은 것이 거의 없는데 가장 도움이 되면서도 재밌었던 요령은 하수구에 베이킹 파우더를 뿌리고 식초를 뿌린 후 뜨거운 물을 부으면 화학제품을 따로 쓰지 않아도 깨끗하게 세척이 된다는 것. 한여름에도 이 방법 덕분에 벌레와 냄새로부터 자유로운 화장실과 부엌을 지켜낼 수 있었다. 저자의 다른 책인 [1인 가구 돈 관리]도 도움이 되는 내용으로 가득하지만 [1인가구 살림법]에 나와 있었던 조언들에 비해 실천에 옮긴 게 별로 없어 길게 쓸 말이 없다.

  • [A house in Paris] - 엘리자베스 보웬

[The Death of the Heart]를 읽고 보웬의 다음 작품으로 뭘 택할지 고민하던 중 [A house in Paris]가 헨리 제임스의 [메이지가 알고 있었던 것]처럼 아이들을 주인공으로 하지만 묘사 면에서 더 자연스럽고 뛰어다나는 감상평을 읽고 택하게 되었다. 주인공인 아이들 헨리에타와 레오폴드가 머무는 현재와 레오폴드의 친부모를 주인공으로 하는 과거를 오가는 [A house in Paris]는 [The Death of the Heart]처럼 과거에 일어난 비극을 자세하게 그려내기 보다는 어른들이 그 비극을 직면하지 않기 위해 침묵과 우회의 장막을 치는 방식과 그 장막을 뚫지 못해 당황하고 상처 받는 아이의 심리에 집중하는 작품.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 속 앨리스를 연상시키는 새침하고 예의 바른 영국 소녀 헨리에타와 자신의 출생의 비밀에 사로잡혀 있는 격렬한 기질의 소년 레오폴드가 우연히 파리에 함께 하루를 머물게 되면서 시종일관 데면데면하다가 어른들이 다른 곳에 정신이 팔린 사이 가장 필요한 우정의 손길을 내미는 장면은 아이들을 낭만화하지 않기에 더욱 감동적이며 이 책에서 가장 중요한 부분이다. [The Death of the Heart]가 번역된다는 소문은 작년부터 들었던 것 같은데 아직 소식이 없어 안타깝다. 헨리 제임스를 능가하는 심리소설의 대가이자 버지니아 울프가 그 영민함을 극찬했던 모더니스트 엘리자베스 보웬의 작품들이 하루 빨리 번역되어 국내에도 소개되기를.

  • [백래시] - 수전 팔루디

[백래시]는 너무 두꺼워서 전자책으로 사라는 추천을 많이 받았고 확실히 들고 다니면서 읽기는 좋았지만 그때그때 필요한 부분만 반복해서 읽기에는 종이책으로 소장하는 게 더 좋지 않을까 싶다. [백래시] 미국의 여성 인권이 80년대 들어 오히려 후퇴한 원인을 깊이 있게 분석한 책으로서, 억압받는 쪽의 인권은 반격과 공격에 맞서 싸울 때만 계속 앞으로 나아갈 수 있음을 분명한 어조로 경고한다. 수전 팔루디가 종교, 미디어, 정치 모든 방면에 있어 실시한 방대한 연구를 통해 수집한 사례들을 보면 나라는 달라도 한국에서도 이미 비슷하게 진행 중인 반격의 사례들이 보여 예측과 방어에 많은 도움이 되는 책. 여성 독자들 사이에서 수많은 책모임을 탄생시킬만큼 방대한 분량이지만 여성 인권의 향상을 바라는 독자라면 꼭 한 번 읽어볼 만한 사회학 연구서.  

[7월]

7,8월에는 너무 더워 정신이 혼미했던 기억 뿐인데 모아보니 그래도 용케도 책을 읽었구나 싶다. 나는 올해 에어컨이 없는 여름을 보냈는데 그래서인지 거의 휴가 중에 기차 안이나 에어컨이 있는 호텔에서 몇 권씩 몰아 읽었다. 어느 경우에도 책을 손에서 놓을 일은 없을 거라고 자신하던 시절이 있었는데 그것도 우리나라가 아열대 기후로 바뀌기 전에나 가능한 소리였다. 

  • [Circe] - 매들린 밀러


[아킬레우스의 노래]를 재밌게 읽은 지인에게 이 책이 매들린 밀러의 [호빗]이라면 [Circe]는 반지의 제왕이라는 말을 한 적이 있다. 전자가 아름다운 소품이라면 후자는 야심찬 대작이라는 뜻이었는데 다른 점이 있다면 [Circe]는 여성이 주인공이고, 이는 결코 우연이 아니다. 매들린 밀러는 분명한 의도를 가지고, 말하자면 작정을 하고 오디세우스와 사랑에 빠져 그를 아이아이아섬에 1년간 머물게 했다는 이야기로 잘 알려진 마녀 키르케를 주인공으로 삼았다. 불멸의 존재인만큼 키르케는 그리스 로마 신화에서 많은 부분에 등장하지만 올림푸스의 중요한 신도, 위대한 영웅도 아니기에 주인공으로서 자신만의 이야기를 갖고 있지 못하다. 사람들은 영웅의 죽음은 집요하게 쫓아가도 마녀는 어떻게 되든 상관하지 않는 경향이 있고 이 공백에서 키르케는 역설적으로 자유를 얻는 것이다. [Circe]는 [아킬레우스의 노래]처럼 휴머니스트적 색채가 짙으면서도 페미니즘적 주제가 훨씬 더 뚜렷하게 드러나며 작가의 모든 선택은 이 주제와 밀접한 관련이 있다. 고대의 신이었던 헬리오스와 오세아노스를 밀어내고 제우스를 중심으로 새롭게 등장한 올림푸스 신들의 이야기에서 시작하여 오디세우스의 모험을 다룬 [일리아드]의 빈 부분을 메우는 결말까지, 수많은 이야기 조각들을 이어내는 작가의 방대한 지식과 신화 속 목소리 없는 여성들을 주체로 되살려내려는 뚜렷한 페미니즘적 의지가 매혹적인 조화를 이루는 작품. 7월의 무더위 속에서도 손에서 놓을 수가 없어 휴가지에서 3일만에 다 읽어 버렸는데 하루 빨리 번역서도 나오기를 기대해본다. 비슷한 관점으로 트로이 전쟁을 카산드라의 입장에서 다시 그려냈다고 하는 웹툰 [카산드라]도 많은 추천을 받았는데 곧 읽어볼 예정.     

  • [딸에 대하여] - 김혜진

[딸에 대하여] 역시 여성 독자들 사이에서 이미 큰 호응을 얻고 있어 늘 마음에 두고 있었는데 너무 더워 아무 것도 눈에 들어오지 않던 시기에 이 책만큼은 유일하게 끝까지 읽어낼 수 있었다. 약자에게 너무나 폭력적인 한국 사회를 레즈비언이자 계약직 지식인 여성으로서 딸을 둔 중년 여성의 눈으로 바라보는 작품. 한국에서 접하기 힘든 퀴어 여성이 중심이 되는 것도 좋았고, 명료하고 단정한 문체도 좋았지만 가장 좋았던 것은 자식을 이해하지 못하는 부모의 눈으로 전개되면서도 손쉬운 화해를 택하거나 좁혀질 수 없는 간극을 강조하기보다는 작지만 가능한 변화를 상상하는 태도였다. 자식이 평범하고 행복하게 살기를 바라는 것이 부모의 당연한 마음이라는 말로 자신의 편견과 두려움을 정당화하는 부모가 얼마나 많은가. [딸에 대하여]는 어머니의 정체된 상태를 이해하는데 멈추지 않고 변할 수 있고, 또 변해야 함을 섬세하면서도 분명한 태도로 이야기한다.  

[8월]

  • [Beneath the Dead Oak Tree] - 에밀리 캐롤

에밀리 캐롤의 후속작을 기다리던 중 작가의 트위터에 올라온 신작 소개를 보고 반가움과 함께 많은 생각이 들었다. [Beneath the Dead Oak Tree]는 부인이 다른 여성들을 잔인하게 살해한 남편에게 복수를 하는 장면으로 끝나는데 작가의 말에 따르면 이 작품 역시 원래는 다른 작품들처럼 여자 주인공이 남자의 죄를 알게 된 후 홀로 눈물 흘린다는 결말이었다고. 달라지게 된 계기는 친했던 남성 친구(다른 코믹 아티스트로 추정되는)의 진면목을 알게 된 일이라는데, 에밀리 캐롤은 이 사건 이후 남성 가해자가 죄책감 없이 빠져나가는 동안 대신 가책을 느끼며 괴로워하는 여성이 많이 등장하는 자신의 작품이 남성들 사이에서 인기가 높은 이유에 대해 생각해 보게 되었다고 한다. 이들 중에 실제로 가해자가 존재하는 것에 대해서도. 에밀리 캐롤의 의도적인 모호함이 주는 공포와 아름다움을 사랑했던 독자로서도 함께 생각해 볼 문제였고 자신을 널리 알린 안전하고 아름다운 모호함에 머무는 대신 앞으로 나아가기를 택한 작가의 결단력에 감탄하지 않을 수 없었다. 늘 천재적이었던 에밀리 캐롤의 진화를 직접 보고 싶은 분들은 shortbox 홈페이지에서 [Beneath the Dead Oak Tree]를 구매할 수 있다. 짧은 단편이지만 언제나처럼 폭발적으로 아름답고 무서운 이미지로 가득한 멋진 작품. 다음 책은 [숲속으로]처럼 긴 작품집으로 2019년 봄에 출간 예정이라고 한다. 

  • [인생에 관하여] - 사라 베이크웰

내 기억이 맞다면 사라 베이크웰의 [인생에 관하여]는 몇년 전 절판되었다 부활했다. 매우 정의 내리기 어려운 인물로 잘 알려진 몽테뉴의 삶을 깊은 애정과 뛰어난 솜씨로 조명한 [인생에 관하여]는 읽자마자 몽테뉴의 [수상록]을 구매하게 만들 정도로 빼어난 전기다. 그리고 [수상록]을 읽고 나면 사라 베이크웰에 대한 감탄은 더 커진다. [수상록] 안의 몽테뉴는 너무 많은 일에 대해 너무나 많은 관점을 가지고 있기에 요약하기가 거의 불가능하며 심지어 일관된 애정을 갖기도 쉽지 않은데 사라 베이크웰은 바로 이런 유연함과 모호함이 몽테뉴의 정수임을 능숙하게 정리하여 보여준다. 여성 작가로서 목소리가 남아있지 않은 몽테뉴의 부인을 재구성해보려는 시도나 몽테뉴 연구가로 매우 유명했으나 지금은 거의 잊혀진 여성 작가를 자세히 되살려 내는 등의 시도도 매우 인상적인 부분. 태어나서 단 한 번도 몽테뉴라는 인물에게 관심을 가진 적이 없었던 독자라고 해도 사라 베이크웰의 매력에는 저항하기 힘들다. 그는 실존 인물로서 바랄 수 있는 최고의 전기 작가다.

  • [하드리아누스 황제의 회상록] - 마르그리트 유르스나스

하드리아누스 황제의 인생에 대해서는 몇년 전 BBC의 라디오 드라마 [글래스 볼 게임]을 듣기 전까지는 아는 게 없었다. 업적이 없어서는 아니었다. 로마 황제에 특별히 관심이 없는 사람에게까지 이름이 알려질 정도로 극적인 인물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안티누스와의 사랑 이야기가 잘 알려진 편이지만 그는 빨리 죽었고 하드리아누스는 오래 살아남아 자신의 인생을 살았다. 즉 그는 괜찮은 황제였지만 기억될 정도로 위대하진 않았고, 나름의 단점이 있었지만 후대가 이름을 기억할 만큼 괴상하지는 않았던 것이다. 그렇기에 그를 한 명의 인간으로 상상하기는 어렵지 않다. 마르그리트 유르스나스 역시 그런 점에 끌렸던 게 아닐까. [하드리아누스 황제의 회상록] 는 위대한 황제가 자신이 만든 역사를 기억하는 기록이라기보다는 한 명의 복잡한 인간이 자신의 인생을 돌아보며 탐구하는 느낌. 몇천년 전에 죽은 황제의 삶을 생생하게 되살려 낸 마르그리트 유르스나스의 방대한 지식과 열정이 잘 느껴지는 작품이다.

  • [우리의 이름을 기억하라] - 브리짓 퀸

[우리의 이름을 기억하라] 역시 이미 여성 독자들 사이에서 많은 추천을 받고 있는 작품. 지나치게 남성 예술가 위주로만 구성된 기존의 예술사에서 벗어나 여성 예술가들을 집중적으로 조명한 뛰어난 교양서다. 이름조차 들어보지 못한 인물부터 오해 받거나 평가절하되어 온 여성 예술가까지 공정하게 소개하고자 하는 뚜렷한 의도가 잘 느껴지며, 나처럼 예술에 깊은 지식이 없는 독자도 쉽게 이해할 수 있도록 자세한 배경 설명과 작품 분석을 제공하는 것도 큰 장점. 특별히 예술사에 관심이 없었던 사람이라도 누구나 재미있게 읽을 수 있다.

[9월]

  • [죽음을 연구하는 여인] - 아리아나 프랭클린

너무 재밌어서 절판된 후에도 전설처럼 남아 있는 책들이 있다. [죽음을 연구하는 여인]도 그 중 하나인데 추천만 수십 번을 받아 온라인 중고 시장에서 구해보려고 오랫동안 애를 쓰다가 우연한 기회에 오프라인에서 구할 수 있었다. 나는 에어컨 없이 지내느라 8월 한 달이 통째로 잘 기억 나지 않는데 그 흐릿한 시기에서 거의 유일하게 또렷하게 기억나는 감정이 이 책을 구하고 느꼈던 기쁨. 헨리 2세 시대를 배경으로 아직 암흑의 중세에 머물러 있던 영국 땅에서 일어난 살인 사건을 해결하기 위해 살레르노의 대학에서 훈련받은 검시관 배수비아 아델리아가 급하게 파견되면서 일어나는 일들을 다루는 이 책은 칭찬 일색인 입소문을 뛰어넘을 정도로 재미있다. 내용 면에서는 CSI와 [장미의 이름]을 결합했다는 평이 맞겠지만, 유대인 학살, 십자군 원정, 살인과 사랑을 모두 여성의 눈으로 풀어내도록 한 선택이 비슷한 다른 역사소설들과 가장 구별되는 장점. 편견과 극단적 신앙으로 가득한 낯선 땅에서 지식과 경험으로 무장한 문명화된 여성 전문가가 고군분투하며 답을 찾아내는 과정이 흥미진진하다. 시리즈를 쓰던 중 작가가 세상을 떠 안타깝게도 세 권 밖에 나와있지 않지만 그마저도 절판이거나 번역되어 있지 않은 것이 수많은 독자를 안타깝게 하고 있는 만큼 보르코시건 시리즈처럼 전권이 다시 국내에 소개되기를 바란다. 그때까지는 다행히 도서관에서 찾아볼 수 있다. 2권까지 만이지만.

  • [살구 칵테일을 마시는 철학자들] - 사라 베이크웰

사라 베이크웰의 뛰어난 재능에 대해서는 위에서 이미 얘기했지만 여러 번 말해도 부족하다. 사르트르와 보부아르, 하이데거 등의 삶을 조명하면서 현상학과 실존주의를 깊이 있게 연구한 이 책은 나처럼 아주 기본적인 철학 상식만 가진 사람이라도 푹 빠져들어 읽을 만큼 재미있다. 창백하고 나약한 지식인들이었으리라는 막연한 이미지와는 달리 양차 대전이 휩쓸고 간 유럽 대륙에서 전쟁을 온 몸으로 겪어내야했던 실존주의자들이 치열한 갈등과 위기 속에서 자신의 철학을 발전시켜 나가는 과정은 어떤 전쟁사 못지 않게 감동적이다. 여성 독자로서 사르트르와 평생 동반자였음에도 철학자이자 사상가로서는 제대로 인정받지 못한 보부아르를 재발굴하고자 하는 작가의 노력도 매우 인상적인 부분. 특히 나치 점령기에 대처하는 방식에 있어 보부아르는 사르트르와 카뮈를 능가하는 굳은 용기를 보여주었으며 명백하게 친나치적 행보를 보인 하이데거와 대비될 때는 영웅적으로 빛난다. 실존주의의 탄생으로 시작해 2차 대전을 거쳐 보부아르의 재평가로 끝나는 멋진 철학서. 


모아놓고 보니 5월부터 9월까지는 습관적으로 영미권에서 출간된 책을 더 많이 읽은 게 눈에 띈다. 남은 2018년에는 한국 여성 작가들 위주로 읽어볼 예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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