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요 내용으로 건너뛰기

수전 프라이스에 대하여

 제인 오스틴에게는 무려 7명의 형제자매가 있었고 질녀와 조카도 백명쯤 있었던 것 같지만 정작 그의 작품에는 아이들이 거의 등장하지 않는다. 사실 제인 오스틴의 소설은 결혼식 후의 삶은 대체로 보여주지 않는데 이는 작가가 평생 미혼이었기에 기혼여성의 삶이나 아이 양육에 대해서는 잘 몰라서라고 생각하기 쉽다. 그러나 현실의 제인 오스틴은 그 시대 대부분의 미혼 여성들처럼 가족 내에서 보모 겸 간호사의 의무를 갖고 있었고, 언니인 카산드라와 함께 온갖 집안 대소사에 불려 다녔으며 새어머니와 사이가 좋지 않았던 질녀를 맡아 키우기도 했다. 부모들은 출산을 도울 사람으로 제인보다는 카산드라를 더 편하게 여긴 듯 하지만 대가족 출신답게 각종 놀이에 정통했던 그는 아이들에게 어릴 때는 훌륭한 놀이 친구로서, 자라서는 격려와 충고를 아끼지 않는 선배 작가로서 영향력이 큰 고모였다. 그러니 제인 오스틴의 소설에 아이들이 등장하지 않는 이유는 '아는 것에 대해 쓰라'는 작가 본인의 유명한 충고와는 별 상관이 없어 보인다. 그는 작가로서 그저 아이라는 소재에 관심이 없었던 것이다. 

  시대의 영향도 아니었다. 제인 오스틴이 살았던 조지안-섭정기의 영국은 백지설을 주장한 존 로크와 [에밀] 한 권으로 아동 교육에 일대 혁신을 불러온 장 자크 루소의 영향을 받아 아동을 어른의 부속품이나 미숙한 존재로 보던 관점에서 벗어나 순백의 어린 천사 같은 존재로 낭만화하는 경향이 두드러진 시대였다. 제인 오스틴은 그저 여기에 동의하지 않았던 것 뿐이다. 여성들이 즐기는 장르인 소설은 근본적으로 열등하다거나 사랑 없는 결혼을 거래처럼 당연히 받아 들여야 한다는 동시대 사람들의 생각을 거부했듯이. 그의 소설 속 아이는 어른이 말로 표현하기 힘들어하는 내면의 감정을 드러내주는 도구로 쓰이거나 ([엠마]에서 나이틀리씨와 엠마를 화해시키는 아기 엠마 혹은 [설득]에서 웬트워스 대령을 움직이게 만드는 앤의 성가신 조카를 떠올려보자) 대가족인 경우에도 어린 아이들은 서로 구별되는 개성 없이 뭉뚱그려 묘사된다(빼어난 작가이기도 한 배우 엠마 톰슨은 [이성과 감성]을 영화화 하기 위해 막내 대쉬우드 자매를 아예 새롭게 재창조해야 했다. 원작에 따르면 그는 너무 어려 아직 성격이랄 것이 없는 상태였다)

 이렇듯 아이에게 고모로서는 몰라도 작가로서는 철저하게 무관심한 제인 오스틴이기에 [맨스필드 파크] 속수전 프라이스의 존재는 더욱 예외적으로 느껴진다. [맨스필드 파크]의 주인공 패니 프라이스 역시 드물게 길고 자세한 어린 시절을 부여받은 인물이긴 하지만 수전은 주변적 인물임에도 불구하고 뚜렷한 개성을 드러내는 거의 유일한 아이라고 볼 수 있다. [맨스필드 파크]는 교묘하게 변형된 신데렐라/고아 소녀 성장기로서, 부유한 친척집에서 천덕꾸러기 신세로 자라던 소녀가 자라서 원래의 가족을 되찾거나 새로운 공간으로 탈출하는 것이 아니라 입양된 곳으로 되돌아가 가치를 인정 받고 결국 새로운 주인이 된다는 구조를 갖고 있다. 고독하게 자라긴 했지만 친척의 부와 교양을 흡수한 성인이 된 패니 프라이스가 그리워하던 가족 품으로 돌아가지만 재결합하는 대신 크게 실망하게 되는 3부가 이 소설의 가장 흥미로운 지점인데 [맨스필드 파크] 초반부와 중반부의 가장 흥미로운 여성 조연이 메리 크로포드라면 후반부에서는 수전 프라이스가 그 자리를 대신한다.

 얼마 후 방문이 열리더니 보다 반가운 것이 들어왔다. 차를 마시기 위한 준비물들이었다. 그날 밤 안에 차를 마시기는 틀렸다고 체념하기 시작하던 참이었다. 수전과 시중드는 어린 하녀가 차와 간식에 필요한 모든 물건들을 들고 안으로 들어왔다. 그런데 어린 하녀의 모습이 하도 보잘것없어서 그녀는 깜짝 놀랐다. 문 앞에서 보았던 하녀가 그나마 더 급이 높은 하녀였던 것이다. 불 위에 찻주전자를 올려놓으면서 언니 쪽을 흘끗 바라보는 수전의 모습을 보니, 자신의 능력과 쓸모를 자랑할 수 있어 기쁘다는 자부심과, 자신이 그런 하찮은 일로 품위를 잃고 있다고 언니가 생각하지나 않을까 하는 염려 사이를 오가며 마음이 두 갈래로 갈라지는 모양이었다. 그녀는 "샐리를 재촉하고, 토스트 굽는 것을 돕기 위해 빵에 버터를 바르러 갔었다고, 그렇게라도 하지 않으면 차를 언제 마실 수 있을지 알 수 없었다고, 여행을 하고 났으니 분명히 언니가 뭘 좀 먹고 싶어 할 거라고 생각했다"고 말했다. (...) 동생이 시기적절하게 친절을 베풀어준 덕분에 머리와 마음이 이내 한결 나아졌다. 수전의 얼굴은 솔직하고 분별이 있어 보였다. 어딘가 윌리엄을 닮은 구석이 있었다. 패니는 이 동생이 기질에서도 자신에 대한 따뜻한 정에서도 오빠를 닮았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마음 속에서 그려보던 모습과는 너무나 다른 가족들의 무례함과 무심함에 충격을 받은 마음 여린 주인공에게 정을 붙일 만한 사랑스러운 동생을 새롭게 소개해주는 것은 매우 평범하고 자연스러워 보인다. 그러나 제인 오스틴은 다른 작품들에서도 보여주었듯 '막연하게 좋은 사람'에게는 별 관심이 없는 작가였고, 아이라고 해서 예외는 아니었다. 14살의 수전 프라이스는 수줍은 언니의 유일한 희망으로 등장했지만 곧 본색을 드러내며 또 다른 골칫거리가 되는 듯 하다가 결국은 충성스러운 버팀목으로 변모하는 입체적인 모습을 보여준다. 

그녀는 수전의 기질에 대해서도 의구심을 품게 되었다. 어머니와 줄기차게 의견이 충돌하고, 톰과 찰스와 경박하게 다투고, 뱃시에게 발끈 성을 내는 모습이 패니는 아무튼 너무나 보기 싫었다. 수전의 그런 모습이 아무 자극도 없이 공연히 생겨난 건 아닐 것이라고 인정하긴 했지만, 그런 일을 그 정도로 밀어붙이는 기질이라면 아무래도 사랑스러운 것과는 거리가 멀지 않을까. (...) 두 주가 지난 다음에야 비로소 그녀는 자신의 기질과 판이하게 다른 수전의 기질이 이해되기 시작했다. 수전도 집안의 많은 일들이 잘못됐다는 걸 알고 바로잡고 싶어 하고 있었다. 열네 살짜리 소녀가 다른 도움은 전혀 없이 순전히 자신의 이성에만 의존하여 집안을 바로잡겠다고 나설 때, 그 방법상으로 과오를 저지른다는 것은 놀랄 일이 아니었다. (...) 수전은 패니 자신의 판단으로도 인정한 똑같은 진실에 입각하여 행동하면서, 그녀가 생각했던 것과 똑같은 가족 체계를 추구해 나갈 뿐이었다. 그러나 수전보다 더 소극적이고 고분고분한 편이었던 그녀는 동생처럼 강력한 주장을 못 펴고 움츠러들었던 것이었다. 그녀가 도망을 치거나 울음만 터뜨릴 수 있었을 뿐인 곳에서, 수전은 도움이 되고자 애쓰고 있었다. 그리고 그녀는 수전이 실제로 도움이 되고 있다는 사실을 알아차릴 수 있었다. (...) 수전은 솔직했다. 그녀는 자신이 무엇을 두려워하는지 털어놓았고, 그렇게 열을 올리며 동생과 다툰 일을 자책했다. 그런데 바로 그 순간부터 패니는 동생의 기질이 얼마나 가치 있는지 이해했고, 동생에게 자신의 좋은 평가와 조언을 얻어내고픈 마음이 얼마나 간절한지도 알아차렸다.

이 과정을 묘사하기 위해 제인 오스틴은 30쪽이 넘는 분량을 수전에게 할애하는데 [맨스필드 파크]가 번역본 기준 760쪽에 달하는 장편이긴 해도 [오만과 편견]의 나머지 베넷 자매들(가엾은 키티여)이나 [설득]과 [노생거 사원]에서 첫째를 제외하고는 이름조차 제대로 주어지지 않은 다른 자매들을 생각해보면 수전 프라이스는 확실히 선택 받은 인물이다. 그리고 나는 제인 오스틴이 이런 작가적 축복을 내려줄 상대로 사랑하기 쉬운 온순한 아이가 아닌 서툴고 거친 14살의 소녀를 택했음에 영원히 감사한다. [맨스필드 파크]가 지루한 작품이라고 말하기는 쉬우며, 패니 프라이스를 따분하게 여기는 것은 햄릿의 우유부단함에 짜증을 내는 것만큼이나 유서 깊고 흔한 반응이다. 분명히 일리가 있는 평가고 나 역시 오랫동안 그렇게 말해왔지만 사실 수전 프라이스와 비슷한 나이에 [맨스필드 파크]를 처음 접했을 때 내 속마음은 그게 다는 아니었다. 나는 수전이 우쭐해하면서도 수줍은 태도로 패니를 위해 직접 준비한 찻상을 들고 등장했을 때부터 패니가 그를 좋아해주기를 마치 내 일처럼 바랐고, 수전이 죽은 동생의 유품을 응석받이인 다섯 살짜리 막내 뱃시에게 뺏겨 분개하고 있음을 이해하고 패니가 수전의 편을 들어주길 바랐다. 맨스필드 파크에서 얼마나 천덕꾸러기였던지 간에 고향집에서 패니는 맏언니였고 누구도 알아주지 않는 수전의 억울한 상황을 해결해 줄 수 있는 유일한 외부인이었기에. 패니의 적절한 개입 이후 수전이 충성을 바치기로 결심한 것도 놀랍지 않았다. 억울한 자를 도우면 은혜를 갚을 것이니, 고집이 센 억울한 자는 배로 갚을 것이다. 옳은 일을 하고 싶다는 강렬한 의지는 있었으나 이를 행동으로 옮길 때마다 전혀 도움이 안 되는 서툴고 거친 태도가 툭하면 튀어나왔던, 참으로 요령부득의 아이었던 나는 분명히 수전에게서 나를 보고 있었다. 수전의 상황과 나의 상황은 사실 그다지 비슷하지 않으며, 다른 가족들에게는 내가 수전보다는 응석받이인 뱃시에 가까워 보였을지 모른다는 점은 중요하지 않았다. 나는 수전의 성격 묘사에 감탄하느라 바빴다. 쉽게 분개하지만 금방 후회하고 반성하는 점이나 누군가 나의 좋은 의도를 알아보고 이끌어주기를 바라는 모습까지, 아직도 [맨스필드 파크]를 펼치면 놀라울 만큼 정확하게 내 마음을 읽어낸 대목들에 얼굴이 빨개지면서도 창피함이 아닌 이해받은 기쁨으로 들떴던 십대 시절의 내가 떠오른다. 제인 오스틴이 조롱이나 동정 어느 쪽으로라도 조금이라도 더 기울었다면 가능하지 않았을 일이다. 

게다가 수전은 자진해서 나서는 성격과 남에게 도움을 주는 성향을 지니고 있었다. 그러니 상냥한 성품과 강렬한 보은 의식을 갖고 있던 패니 못지않게 그 자리에 잘 어울리는 적임자였다. 수전은 이내 결코 보낼 수 없는 존재가 되었다. 그녀는 처음에는 패니에게 위로가 되는 존재로, 그다음은 언니를 돕는 조수로, 마지막은 언니의 대역으로 맨스필드에 정착했다. 일이 되어가는 모양새로 볼 때 언니처럼 계속해서 그 곳에 살 것 같았다. 언니보다 더 대담한 기질과 더 태평한 기질 덕분에 그녀는 그곳의 모든 것이 편안하게 느껴지는 모양이었다. 자신이 대해야 하는 사람들의 기질을 재빨리 이해했고, 하고 싶은 일을 억누르는 타고난 소심함도 없어서 그녀는 이내 환영을 받고 모두에게 도움이 되는 존재가 되었다.

수전 프라이스는 결말마저 예외적으로 자세하다. 고통스러운 이별이었던 패니의 경우와는 달리 수전은 고향집을 가벼운 마음으로 떠나 맨스필드 파크에 즐겁게 정착한다. 언니의 다정한 지도와 독서 덕에 단점은 교정되고 장점은 강화된 그는 어른들이 각종 드라마에 휘말려 있는 동안 마음껏 자유를 누리며, 예민하고 소심한 패니를 비참하게 만들었던 모욕에도 고통받지 않는다. 패니에게서 수전으로 이어지는 이런 교정과 계승은 복종과 순종을 소녀의 미덕으로 여기고 가족 간의 결합을 통해 체제 유지를 옹호하는 작가의 보수성을 드러내는 대목이라고 이야기하면서 이 글을 끝맺을 수도 있다. 이는 많은 연구들이 뒷받침하듯이 분명한 사실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것이 수전의 탄생 배경의 전부는 아니라고 나는 여전히 믿고 있다. [맨스필드 파크]의 수전 프라이스는 좋은 의도와 거친 태도의 불운한 조합으로 득보다 실이 많았던 세상 모든 서툰 소녀들에게 제인 오스틴이 보내는 윙크이며, 그 역시도 8형제의 7번째 아이였던 어린 시절 조금은 수전 프라이스였을지 모른다. 그러니 제인 오스틴의 명성은 익히 들었으나 한 번도 엘리자베스 베넷인 적이 없어 마음 붙이지 못했던 독자라면 [맨스필드 파크]를 펼쳐보자. [오만과 편견]의 리지 베넷이 영국 문학의 가장 사랑받는 딸이라면 수전 프라이스는 가장 공정하게 이해 받은 여동생이니까.  

written words

와조스키 님의 창작활동을 응원하고 싶으세요?

댓글 3

SNS 계정으로 간편하게 로그인하고 댓글을 남겨주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