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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스틴의 쌍년들

  <다락방의 미친 여자>의 저자 산드라 길버트와 수전 구바는 풍자 속에 숨겨진 제인 오스틴 자기 분열적인 불안에 대하여 이야기한다. 다락방에 갇혀 있었던 미친 버사가 브론테 내면의 공포스러운 가능성 중 하나였던 것처럼, 오스틴은 전복적인 상상력과 말솜씨를 가진 여성들에게 자신의 모습을 투영하면서도 동시에 그들을 풍자함으로써 시대가 요구하는 여성상과 맞지 않는 자신의 작가적인 상상력과 재능을 스스로 경계하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는 것이다. 오스틴이 만들어 낸 여성들 중 좀 더 부정적으로 그려진 인물들이 오히려 더욱 사랑받는 까닭은 어쩌면 창작자의 이런 이중적인 태도에 필연적으로 따라오는 복잡성과 다층성 때문일지도 모른다. 오스틴의 작품들이 티비 시리즈나 영화로 옮겨질 때 가장 재능 있고 매력 있는 배우들에게 이런 캐릭터들이 주어지는 것도 아마 비슷한 이유에서가 아닐까.



"침묵에는 안전은 있지만, 매력은 없다."



 

엠마 우드하우스는 어쩌면 좋아하기 힘든 인물일지도 모르지만 제인 페어팩스는 그냥 싫다. 어릴 때 <엠마>를 처음 읽은 후 내가 내린 결론이었다. 엠마는 경솔하고 상상력이 지나치게 풍부하며, 다른 사람들을 자기 뜻대로 움직이고자 하는 고집이 있는 등 여러가지 단점이 있지만 이야기 내적으로 충분히 조롱 받고 혼이 나고 있을 뿐만 아니라 그녀의 선한 마음과 반성하는 태도는 엠마를 싫어하기 상당히 힘든 인물로 만든다. 게다가 엠마는 늘 행동하는 캐릭터로 우스꽝스러운 일들을 끊임없이 일으키기에 그녀의 철없는 행동과 오해가 불러오는 일련의 사건들은 이야기를 끌어가는 힘이 된다. 반면에 제인 페어팩스는 마치 오로지 반-엠마 세력이 되기 위해 세상에 태어난 것처럼 느껴질 정도인데 수동적이다 못해 오만하게까지 느껴지는 냉정함을 갖고 있을 뿐만 아니라 자신의 목소리를 내는 일이 없어서 공감하기 어려운 인물이다. 엠마가 제인에게 몇 번이나 다가가려고 노력했지만 무참하게 거절당한 후에 느끼는 불쾌함은 제인의 비밀에 대해서 그녀가 전혀 모르는 상태라는 것을 감안할 때 이해할 만한 반응이며, 어떤 면에서는 독자들과 엠마를 연결시켜주는 고리가 되기도 한다. 설사 엠마를 그다지 좋아하지 않는다고 해도, 제인 페어팩스를 보면서 뭔데 저렇게 어렵게 굴어? 이런 생각이 들지 않을 수가 없는 것이다. 엠마의 활발한 상상력이 그녀를 비난하는 근거가 되듯이 제인의 침묵은 그녀를 미워하는 것에 정당성을 부여하게 된다.


 그러나 <다락방의 미친 여자>에서 산드라 길버트와 수전 구바는 엠마의 상상력과 제인의 침묵이 스스로를 보호하는 유일한 무기였다는 것을 지적한다. 둘은 폐쇄적이며 보는 눈 많고 말 많은 공동체에 발이 묶여 있는 입장이라는 점, 그리고 결국 타인들이 꾸며내는 이야기 속의 졸이었다는 점에서 매우 비슷한 처지에 놓여 있다. 엠마는 경솔하고 미숙하게나마 통제권을 갖길 원해 이야기를 꾸며내는 반면 제인은 침묵 속으로 숨어 들어간다는 반응의 차이가 있을 뿐인데, 이는 제인 오스틴의 작품에서 반복적으로 나타나는 갈등 구조라고도 볼 수 있다. 경솔한 반항의 대가를 받을 것이냐 침묵하다가 희생당할 것이냐. 후자를 택한 제인은 이해 받을 만하나 점점 흐릿해져 자신의 이야기에 아무런 힘을 행사할 수 없게 되어버리며, 통제권을 갖길 원한 "상상하는 자"인 엠마는 자기 혐오와 조롱이라는 벌을 받게 된다.

엠마는 다른 어떤 인물들보다도 더 오스틴이 자신의 상상력에 대해서 갖고 있는 양가적인 태도를 보여주고 있다. (...) 엠마는 분명 소설가 오스틴의 화신이다. (...) 오스틴처럼 엠마도 닳아빠진, 진부한 로맨스 이야기를 스스로 거부할 만큼 영리하다. 만일 엠마가 자신이 만든 이야기에 등장하는 인물인 양 사람들을 조종하는 예술가라면, 오스틴은 이러한 행위의 비도덕성뿐만 아니라, 그 원인과 동기도 강조하고 있다. 엠마는 아버지를 달래는 일 외에는 아무것도 할 일이 없다. 엠마의 지성과 상상력을 감안한다면, 세속적인 현실을 변형시켜 보려는 그녀의 성마른 시도는 전적으로 이해할 만 하다.

[다락방의 미친 여자]

그러니 <엠마>를 재해석할 때 자신의 활발한 상상력 외에는 기댈 것이 없는 답답한 엠마의 상황이나 엠마를 향한 작가의 풍자를 드러내지 않으면 비슷하지만 전혀 다른 이야기가 탄생하게 된다. 우리는 <엠마>를 읽을 때 종종 엠마의 아버지인 우드하우스 씨가 병적인 건강 염려증 때문에 집에 스스로를 감금한 상태나 다름없는 생활을 하고 있으며, 이야기의 시작이 엠마의 유일한 벗이자 어머니를 대체할 수 있었던 유일한 존재인 그녀의 절친한 가정교사가 결혼을 하여 엠마가 혼자 고립되다시피 하는 상황에서 시작한다는 사실을 쉽게 간과한다. 실버스톤의 깜찍한 <클루리스>가 이런 경우로, 이 영화는 매우 재치있는 엠마의 현대판 재해석이지만 배경을 20세기의 부유한 L.A.의 동네로 옮겨 주인공인 쉐어를 훨씬 더 자유로운 환경에 던져놓음으로써 엠마 우드하우스처럼 꼭 상상력을 발휘하여 현실을 바꾸려고 노력할 필요가 없게 만든다.(물론 이 영화는 패러디이므로 두 캐릭터가 꼭 같을 필요는 없다.) 기네스 펠트로와 토니 콜렛의 <엠마>는 좀 더 원작에 충실한 재현이고 유안 맥그리거의 괴상한 헤어스타일과 빼어난 노래 실력을 동시에 구경할 수 있는 그럭저럭 재미있는 영화지만 이야기 내적으로 엠마에게 따라붙는 풍자적 시각이 다소 약한 편이다. 실제 오스틴의 엠마를 제일 잘 옮겼다고 생각되는 버전은 얼마 전에 로몰라 가라이 주연으로 BBC에서 나온 티비 시리즈 <엠마>로, 발랄하고 철 없이 남의 인생에 간섭하기만 하는 듯하면서도 건강 염려증에 걸린 아버지를 홀로 돌보느라 발이 묶인 십대 소녀 엠마를 표현해낸 로몰라 가라이의 연기가 아주 훌륭하다. 이 4부작 시리즈는 오스틴이 의도했던대로 엠마를  풍자하면서도 따뜻한 시각으로 그리고 있으며, 캐릭터 해석을 잘 하고 흥미로운 여성 캐릭터를 연기하는 것에 뛰어난 재능이 있음을 여러 번 입증했던 로몰라 가라이는 이번에도 우스꽝스러울 수 있는 인물을 밖에서 논평하는 식으로 아이러니를 담아 연기하지 않고 정성과 진심을 쏟아서 생생하게 입체적인 인물로 그려낸다. 로몰라 가라이에게  엠마를 맡기기로 결정한 BBC의 누군가는 제인 오스틴의 축복을 받을 자격이 충분하다.



그러나 결론적으로 엠마는 운이 아주 좋은 축이다. 제인처럼 선하지만 수동적인 인물에게는 결코 악운이 닥치지 않는 반면에 엠마처럼 주인공의 별을 타고나지 못한 비슷한 성격의 조연들은 성숙한 이중성/통합된 자아라는 선물을 받지 못한 채 끝내 울타리 밖으로 쫓겨나게 되는데, 사실 진짜 재밌는 건 이런 아가씨들이다.




"그녀는 악을 생각하지 않는다. 다만 그것을 말할 뿐이다."


<맨스필드 파크>의 주인공들은 재미가 별로 없다. 특히 남자 주인공이 그렇다. 여자 주인공인 패니 프라이스는 내놓으라하는 오스틴 덕들조차도 "자기는 전혀 잘못을 하지 않고 남의 잘못만 고자질 하는 아이"같은 느낌이라고 할 정도로 답답하지만 은근히 강단이 있는 성격이고 어쨌든 꾸준히 성장하는 인물인데 반해 에드먼드는 착하고...뭐 착하고 하여간 착한 것 같다. 좋은 성직자가 될 것은 확실하다.


남녀 주인공이 지루하다 -> 주인공의 비중이 제일 높다 -> 책도 지루하다 삼단 논법이 나올 것만 같지만 <맨스필드 파크> 책 자체는 아주 재미있다. 이 책에는 여러 층이 있고 다양한 사건들이 일어나기 때문에 끝까지 인물들이 어떻게 될 지 알 수 없는 재미도 있고 무엇보다 악역들이 활기차고 개성있다. 오스틴의 악당들 중에서는 거의 유일하게 스스로를 풍자할 줄 아는 성격인 헨리 크로포드는 물론이고, 주인공인 패니의 대척점에 서 있다고 볼 수 있는 여동생인 메리 크로포드도 아주 재미있는 인물이다. 역시나 오스틴의 다른 갈등 양상과 마찬가지로 패니와 메리는 마음대로 이동할 수 없고 기댈 수 있는 부모가 없다는 점에서 서로 매우 비슷한 처지에 있고 상호 보완적인 성격을 가지고 있으면서도 표면적인 우정 이상으로는 가까워지지 못한다. 둘은 한 남자를 두고 경쟁하는 라이벌 관계로서 -비록 메리는 이를 인식하지 못하지만- 메리는 페니에게 진정한 관심이 없고, 페니는 메리의 매력에 위협을 느끼며 다소 공정하지 못할 정도로 그녀가 자신에게 베푼 친절과 애정의 제스쳐를 의심하며 그녀의 경박함을 비난하기 때문이다. 메리의 가장 흥미로운 점은 다른 오스틴의 작품들 속에서 풍자의 대상이 되는 여자들이 사랑의 도피나 재산을 차지하려는 음모, 정보의 의도적인 은폐 등 파괴적인 잘못을 저지르는데 반해 메리는 어떤 나쁜 짓에도 직접 가담하고 있지는 않다는 것이다. 그녀는 사랑의 도피를 하기에는 너무 영리하고 너무 냉소적이며 허황된 드라마의 허구를 꿰뚫어 볼 수 있는 이성적인 인물로서, 연극 해프닝에서 볼 수 있듯이 허구가 주는 매력과 자유로움의 쾌락을 누구보다 즐기지만 그 파괴성 역시 에드먼드와 패니와 공유할 수 있을 정도로 성숙한 인식을 갖고 있기도 하다. 그러나 그녀는 그런 인식으로 인해 죄책감을 느끼거나 고통 받지 않는데 이는 결국 에드먼드의 혐오를 불러일으키고 그 빛나는 재치와 매력에도 불구하고 메리는 에드먼드의 미래에서 추방당하게 된다. 교회와 가부장의 권위로 대표되는 질서를 거부하고 세속적인 가치를 적극적으로 옹호하며, 냉소적이다 못해 이단적이기까지 한 메리는 패니의 말처럼 친구로서는 신뢰할 수 없을지 몰라도 오스틴이 창조해낸 여자들 중 가장 활발하게 살아 움직이고 자신의 뜻대로 움직이는 인물이다. 나는 에드먼드에게 차인 것을 결코 악운으로는 생각할 수 없기 때문에 메리는 결국 괜찮아 졌을 거라고 생각한다. 화이팅.

헨리의 죄는 실제 행동이고, 메리의 죄는 순전히 수사적인 것일지라도, 메리가 훨씬 더 철저하게 비난받는다. 왜냐하면 메리의 방종은 자신의 사회적인 역할에 대한 좀 더 심각한 도전을 의미하기 때문이다. (...) 에드먼드도 결국 메리의 장난기를 자신의 문화에 굴복하는 것을 거부하는 의미로, 매력적이지만 비도덕적인 반항으로 인식한다. 장난은 메리에게 그녀가 원하는 것이면 무엇이나 될 수 있는 자유를 주고 심지어는 한 가지 정체성을 선택하는 것이 아니라 다양한 목소리를 시도해 볼 수 있게 해 주기 때문이다.

[다락방의 미친 여자]


<맨스필드 파크>는 다른 모든 오스틴의 작품들처럼 꽤 여러 번 티비 영화와 드라마로 나왔지만 내가 제일 좋아했던 메리 크로포드는 2007년 티비 영화의 해일리 앳웰이었다. 권위에 다소 악의적인 냉소를 품고 있으면서도 이를 숨기고 영리하고 발랄하게 빛나던 메리에 이 배우는 딱이었다. 영화에선 헨리 역을 맡은 배우가 인상이 다소 흐릿했지만 원작에서는 크로포드 남매의 관계도 아주 재밌는데, 서로를 꿰뚫어보면서도 에드먼드와 패니의 일방향적인 순애보와는 다른 사업 파트너 같은 냉정한 동지애의 느낌이 매력적이다.



 "가장 절묘한 불행의 미소와 완전히 의기소침한 웃는 눈"




<노생거 애비>는 오스틴의 "이중적 말하기"가 가장 극명한 작품이다. 이 소설에서 오스틴은 당시 유행하던 고딕 소설의 우연적인 사건 전개와 드라마틱하게 기절을 해대는 여자 주인공들을 풍자하면서도, 그녀로서는 드물게 강한 목소리를 내어 소설 장르와 여성 작가들을 옹호한다. 섭정시대의 고딕 소설이 하나의 유형으로 머릿 속에 박혀 있지 않은 현대의 독자들로서는 이것이 어디까지가 풍자이고 어디까지가 옹호인가 하면서 좀 어리둥절해지게 되는데, 이 작품이 종종 오스틴의 작품 중에서 가장 가볍고 하찮은 작품으로 치부되는 이유도 이런 시대의 차이에서 오는 혼란스러움 때문이 아닐까 싶다. 이 소설의 주인공인 캐서린 몰란드는 고딕 소설에 빠져 현실도 그럴거라 착각하는(혹은 그렇기를 살짝 바라는) 어린 소녀로서 성숙한 어른 남자로부터 풍자의 대상이 되는 동시에, 남들이 마음대로 짜놓은 이야기의 졸로서 희생양이 되기도 하는 인물이다. 그녀를 통해 오스틴은 이중적인 풍자를 하고 있다. 현실은 결코 고딕 소설 같진 않지만, 당시 여자들의 삶은 남자들의 가부장적인 권위와 취향에 맞게 통제되고 조정된다는 점에서 오히려 허구인 고딕 소설들보다 더욱 위험하고 공포스럽다는 것이다. 가장 극명한 예인 헨리 틸니의 어머니의 죽음에 드리워진 가정 폭력의 느낌은 캐서린 몰란드의 몽상이라고만 보기에는 의심스러운 점이 분명히 있다. 이 책은 그런 의미에서 가장 얌전하고 미숙한 듯 하면서도 가장 폭로의 성격이 강한 작품이다.


메리 크로포드나 엠마 우드하우스보다는 좀 더 평면적이고 노골적인 악역인 이사벨라는 오스틴이 풍자하고자 했던 "한 입으로 두 말하며 할 거 다 하는" 당시 대중 소설들의 여주인공들을 놀려먹기 위해 창조한 인물처럼 보인다. 그녀는 정숙함과 여자다움, 여성간의 우정의 중요함을 캐서린에게 늘어놓지만 남자들 앞에서는 반대로 행동해 정직하고 미숙한 캐서린을 끊임없이 혼란스럽게 하며, 그녀의 주된 무기는 사실의 은폐와 이중적인 언어 구사다. 비록 이사벨라의 행동은 성숙한 여인의 악의적인 복수극이라기보다는 어린 아가씨의 여우짓 같아서 우스꽝스럽고 흥미롭지만, 그 경솔함 밑에 이사벨라와 캐서린은 오스틴의 소설 속 대척점에 있는 자매들과 친구들이 대부분 그러하듯 같은 것을 원하고 있다. 마치 캐서린에게 고딕 소설에 대한 열정을 불 붙이곤 결말을 미리 말해버려 흥을 깨버리던 것처럼 이사벨라는 자신의 야망(좋은 집안의 남자와 결혼해 이야기의 주인공이 되겠다는 욕구)의 좌절을 통해 캐서린에게도 같은 일이 일어날 수 있음을 불길하게 암시한다. 심지어 둘은 같은 집안 남자에게 구애를 했다가 재산이 없다는 같은 이유로 비슷한 형태의 굴욕을 당한다.

다시 말해서, 캐서린은 좋은 짝을 만나는데 성공한다. 그런데 이사벨라는 좋은 짝을 만나기를 원했다는 이유 때문에 가혹한 벌을 받는다. 결국 진정한 여주인공의 방식대로 케서린은 진정한 구혼자를 만나기 위해 잘못된 구혼자를 거부한다. 그리고 대부분의 센티멘털 소설의 결말만큼이나 공세적으로 조작된 결말에 의해서 캐서린은 행복을 얻고 구원받는다.

[다락방의 미친 여자]


<맨스필드 파크>를 영화화 하면서 BBC에서 당시에는 아직 신예였던 캐리 멀리건을 이사벨라 소프에 기용한 것은 정말이지 신의 한 수였다. 캐서린 몰란드 역의 펠리시티 존스도 좋은 캐스팅이었지만 멀리건 특유의 의뭉스러움이 속을 드러내지 않는 이중적인 이사벨라와 너무 잘 어울려서 나는 지금은 그야말로 미친 듯이 좋아하는 캐리 멀리건을 한동안 좀 꺼려하기도 했었다. 멀리건 특유의 어딘가 상처받기 쉬워 보이는 면이 있는 것도 허세와 매력만으로는 커버되지 않는 가난한 집안의 아가씨인 이사벨라의 불안한 입지를 표현하는데 잘 들어맞았고. 지금 페미니즘의 깃발을 높게 드는 여배우들이 모두 오스틴 기준으로는 악역에 가까운 쌍년들을 연기한 적이 있었다는 사실은 오스틴의 팬일 뿐만 아니라 이 여배우들을 몽땅 다 좋아하는 나를 즐겁게 할 뿐만 아니라 분명히 시사하는 바가 있다. 영국의 남자 배우들이 낭만적인 주인공 로미오보다는 맥베스를 연기하는 것을 더욱 큰 명예로 알듯이 여배우들 역시 오스틴의 저주와 축복을 동시에 받은 쌍년들을 연기할 때 더욱 신나는 게 아닐까 그런 생각을 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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