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코니 윌리스의 우주를 여행하는 독자를 위한 안내서

 언젠가는 이런 날이 올 줄 알았다. 2018년 11월 현재,  코니 윌리스의 옥스퍼드 시간 여행 시리즈는 번역 작업 중이라는 마지막 작품 [올 클리어]만 빼고 모두 동시에 존재 중이다. 드디어 미출간도, 절판도 없다. 그동안 코니 윌리스와 옥스퍼드 시간 여행 시리즈에 대해 여러 번 글을 썼지만 모든 조각이 다 맞춰진 상태는 처음이라 이번에야말로 총정리를 할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제목은 저렇게 붙여 봤지만 이 글은 지난 10년간 열심히 읽었지만 많은 부분을 잊어 버렸고, 앞으로도 잊어버리게 될 미래의 나를 위한 안내서다. 이제는 소개글이 아닌만큼 스포일러가 잔뜩 포함되어 있음을 미리 말해둔다.

옥스퍼드 시간 여행 시리즈는 완성되는데 30년이 걸렸고, 쓰여진 순서부터가 마치 시간 여행 같다. 우리의 시간대에서는 [화재 감시원]이 가장 먼저 출간되었지만 시리즈에서는 [둠즈데이 북]이 가장 먼저 일어났으며, 시간 여행인만큼 많은 주인공들이 완결편인 [올 클리어]에 가면 과거의 어느 시점에 함께 존재하게 된다.  

  • 쓰여진 시기 : [화재 감시원](1982) - [둠즈데이 북] (1992) - [개는 말할 것도 없고] (1998) - [블랙아웃], [올 클리어](2010)
  • 일어난 시기 : [둠즈데이 북] 키브린의 중세로의 시간여행(2054) - [화재 감시원] 키브린의 룸메이트인 존 바솔로뮤의 2차 세계대전 대공습 당시 런던으로의 시간여행(2054) - [개는 말할 것도 없고]의 네드와 베리티의 빅토리아 시대로의 시간 여행(2057) - [Black out], [All clear]의 마이클, 폴리, 에일린의 2차 세계대전 당시 영국으로의 시간여행(2060)

코니 윌리스는 속편을 거듭하다 시들어버리는 시리즈물을 싫어한다고 밝힌 적이 있다. 그래서인지 [개는 말할 것도 없고]까지만 해도 어떻게 읽든 순서는 그닥 중요하지 않았다. 세 작품 사이에 느슨한 연결고리만이 존재했기 때문. 시간 여행 이론은 물론 작품을 거듭하면서 확장되고 진화하지만 결국 한 번은 주인공들이 친절하게 다 설명을 하기 때문에 전작을 건너 뛰었다고 후편을 못 읽을 이유도 없었다. 그러나 [블랙아웃]과 [올 클리어]에 오면 작품 분위기는 다소 달라지는데, 시리즈의 완결판이라 볼 수 있는 이 두 작품에서 주인공들은 같은 시간대에 존재하는 시간 여행자들을 찾아 나서야 한다. 바솔로뮤의 모험을 몰라도 [둠즈데이 북]은 읽을 수 있고 키브린과 [개는 말할 것도 없고]의 베리티는 아무런 접점이 없지만 [블랙아웃]과 [올 클리어]는 전작들을 다 읽고 오는 게 좋다. 반지 원정대의 모험을 알고 읽으면 [호빗]이 더욱 재밌는 것과 비슷하다.

예전에는 쓰여진 시기에 따라 소개하는 방식을 택했지만 이번에는 시간 여행 유니버스 안의 시간대에 따라 연대기적으로 정리해보았다. 이 순서는 [올 클리어]에 와서 매우 중요해지는데 나는 참을성이 강한 독자가 아니라서 다시 읽을 때마다 매번 헷갈리는데 지쳤기 때문. 

  • 시간 여행이 발명되다 (201?-2020) 

코니 윌리스의 세계에서 시간 여행이 정확히 언제 시작되었는지는 알 수 없다. 마지막 작품인 [블랙아웃]과 [올 클리어]에서 그동안 사람들이 50년이 가까운 시간 동안 무사히 (과연?) 시간 여행을 해 왔다고 하고 있고 [개는 말할 것도 없고]에서 2020년 전에 시간 여행이 발명되었다고 하니 2010년대로 짐작만 할 수 있을 뿐. 반면 누가, 왜 시작했는지는 세 번째 작품인 [개는 말할 것도 없고]에 정확히 나와 있다. 

시간 여행이 처음 발명되었을 때 다비와 젠틀라가 이를 증명했다. 그 둘은 과거의 보물을 약탈할 목적으로 네트를 만들었고 모나리자부터 투탕카멘의 무덤에 있던 보물에 이르기까지 모든 것을 훔쳐 돌아오려 했지만 네트가 열리지 않자 그 대상을 바꿔 좀 더 세속적인 물건, 즉 돈을 훔쳤다. 

다행히 네트는 세균부터 총탄까지 어떤 것도 통과시켜 주지 않았고, 다비와 젠틀라에게 돈을 댔던 다국적 기업이 흥미를 잃자 시간 여행 기술은 과학자들과 역사 연구가에게로 넘어왔다는 것이 코니 윌리스의 설정. [개는 말할 것도 없고]는 시간 여행의 기술적인 면이 처음으로 자세히 소개되는 책인데 작품들 사이에 긴 공백이 있다 보니 이 책이 등장한 후 첫 작품인 [화재 감시원]에는 설정이 맞지 않는 부분이 생기게 된다. 반면 [블랙아웃]과 [올 클리어]는 [개는 말할 것도 없고]의 연장선에 있음이 분명히 느껴지며, 독자들도 믿게 된 시간 여행 이론을 다시 뒤집음으로써 긴장감을 고조시키는 방식으로 진행된다. 아주 중요한 인물 중 하나인 제임스 던워디의 나이 역시 정확하게 알 수는 없지만 그가 어릴 때 시간 여행이 발명되었으리라는 짐작은 해 볼 수 있으며, 제임스 던워디가 옥스퍼드 학생이 되었을 무렵에는 시간 여행 기술은 이미 대학으로 넘어온 상태였다.

  • 2010년 크리스천 사이언스 공동체에서 캐나다 거위 독감이 발병하다 (2010)

[둠즈데이 북]에서 순식간에 많은 사람을 죽이고 주인공 키브린 역시 감염된 전염병이 아니라 그 전에 일어난 다른 전염병이다. [둠즈데이 북]의 배경인 2054년 옥스퍼드를 휩쓴 바이러스가 사실 1318년에 죽은 중세 기사의 무덤에 있었던 감기 바이러스라는 사실을 쉽게 예측하지 못하도록 코니 윌리스가 던져둔 일종의 레드 헤링. 2010년의 거위 독감은 [개는 말할 것도 없고]에서도 네드 헨리가 시간 여행 중 시간대를 측정하는 기준이 될 정도로 이 세계에서 큰 사건이었던 것으로 보인다.

  • 세인트 폴 대성당이 파괴되다 (2015년 9월)

노골적인 앵글로파일인 코니 윌리스는 세인트 폴 대성당에 대한 자신의 애정을 제임스 던워디에게 불어넣었고, 그는 자신의 학생들에게 이를 물려준다. 이 세계에서 세인트 폴 대성당은 2018년 5월 한 공산주의자의 자살 폭탄 테러로 파괴되는데, 82년작인 [화재 감시원]에서 등장한 설정인만큼 21세기에는 다소 어색해서인지 2010년에 출간된 [블랙아웃]에 와서는 공산주의자 라는 말은 사라지고 테러리스트가 대신하고 있다. 

  • 제임스 던워디가 세인트 폴 대성당을 보러 가다 (2015-2018/1940년 9월 17일)

미래의 옥스퍼드에서 가장 먼저 일어난 시간 여행의 주인공은 제임스 던워디다. [둠즈데이 북]에서 잠깐 언급되고 [블랙아웃]에서 다시 등장하는 이 여행에서 아직 혈기왕성한 18살 옥스퍼드 학부생이었던 던워디는 사전 조사 작업 중에 막간을 이용해 세인트 폴 대성당을 보기 위해 멋대로 달려간다. 앞의 작품들에서는 그저 던워디 교수의 아름다운 추억 정도로만 묘사되어 왔던 이 여행은 [올 클리어]에서 매우 중요해지기에 구체적인 날짜를 기억해 둘 필요가 있다. 옥스퍼드에서의 시간대는 명시되지 않지만 세인트 폴 대성당이 파괴된 후인 2015년부터 2018년 사이에 일어난 일로 짐작 가능하며, 여행을 떠난 시간대는 1940년이다. 1940년 9월 17일 18살의 제임스 던워디는 런던에 있었다. 그리고 어떤 시간 여행자도 같은 시공간대에 두 번 존재할 수는 없다.

  •  엘리자베스 비트너가 주교의 그루터기를 구하러 가다(2018년 4월/1940년 11월 14일)

[개는 말할 것도 없고]에 등장하는 일이다. 제임스 던워디가 학생 시절 짝사랑했던 동기 엘리자베스 비트너는 남편을 위해 몰래 1940년 11월 14일 한창 나치의 공습을 받고 있었던 코번트리 성당으로 시간 여행을 떠난다. 최초의 코번트리 성당을 지었던 메리 보토너의 후손 비티 비트너와 결혼한 후, 엘리자베스는 코번트리 성당이 팔리게 되면 주교인 남편이 상심할 것을 염려해 40년대로 되돌아가 원래의 코번트리 성당에서 물건들을 훔쳐오겠다는 과감한 결정을 내린다. 어차피 공습 중에 부서질 물건들이니 영향을 미치지 않으리라 스스로에게 정당화하면서. 하지만 자신의 행동이 심각한 인과 모순을 일으켰을지 모른다는 불안감은 떨치지 못한 채.

  • 키브린이 중세로 시간 여행을 떠나다(2054년 12월 22일/1348년 12월)

모든 시대는 10 - 그것은 쥐였습니다 - 백설공주와 궁정 로맨스 - 묵시적인 곱스토퍼 - 성녀와 아스프린 - 십자군 원정대

[둠즈데이 북]은 시간 여행 시리즈에서는 두 번째 작품이지만 시간상으로는 가장 먼저 일어난 학부생의 시간여행이다. 중세를 보고 싶다는 열망에 불타는 키브린은 중세 학부의 도움 안 되는 교수들이 아닌 현대사 전공인 던워디 교수를 찾아와 지도를 부탁한다. 전염병에 걸린 네트 기술자 바드리의 실수로 흑사병이 도는 중세로 떨어진 키브린은 [화재 감시원]의 바솔로뮤와 마찬가지로 매우 성실하고 이타적인 인물로서, 인류를 사랑하고 놀라울 정도로 에고를 내세우지 않는 코니 윌리스의 사랑스러운 시간 여행자들의 원형과 같은 인물. 시간 편차, 인과 모순, 네트의 오작동 등의 중요한 개념들이 처음으로 소개되긴 하지만 이 책의 분위기는 [화재 감시원]에 더 가깝다. 시간 여행의 기술적인 면보다는 극한 상황 속에서 나타나는 보통 사람들의 영웅적인 모습이 중심이 되는 아름답고 웅장한 작품. 흑사병이 도는 중세와 전염병이 퍼진 미래를 병행하는 암울한 설정에도 불구하고 꾸준히 작가의 최고작으로 꼽히는 책이며, 시간 여행의 기술적인 면이 크게 강조 되지 않아 SF 팬들보다는 나처럼 대체 역사물이나 역사에 관심이 많은 독자층에게 더 인기가 많은 것 같기도 하다.

하지만 마냥 동화 속 이야기 같지는 않을 것이라 하셨던 점에 대해서는 교수님이 틀리셨어요. 어디를 둘러봐도 동화에서 막 튀어나온 것들로 가득해요. 아그네스의 빨간 망토와 후드, 쥐 우리, 포리지 그릿, 그리고 지푸라기와 나뭇가지로 만든 오두막들이 가득한 마을까지요. 이렇게 허술한 오두막이라면 늑대가 전혀 힘들이지 않고 날려 버릴 수 있을 것 같아요. 종탑은 라푼젤이 갇혀 있었을 법한 모양이고요. 고개를 숙이고 수놓는 일에 열중하고 있는 로즈먼드는 칠흑같이 검은 머릿결에 하얀 모자, 사과같이 붉은 뺨까지, 백설 공주를 그대로 가져다 놓은 듯하네요. 

[둠즈데이 북]은 시간 여행 유니버스에서 가장 독립적으로 움직이는 것 같지만 던워디 교수와 13살 소년 콜린은 [블랙아웃]과 [올 클리어]에서 다시 매우 중요한 역할을 맡게 된다. 콜린의 이모할머니인 옥스퍼드 대학의 의사 메리 아렌스 역시 중요한데, 다시 등장할 수는 없는 인물이지만 역시나 중요하다. 특히나 이름이. 메리. 그녀의 이름은 메리고, 위기의 상황에서 다른 사람들을 돕기 위해 자신을 희생했다.

  • 존 바솔로뮤가 나치 공습을 받는 세인트 폴 대성당으로 떠나다(2054년/1940년 9월 20-12월 31일)

St. Paul이 아니라 St.Paul's - 존경하는 던워디 교수님 - 고양이는 말할 것도 없고 - 나는 공산당이 싫어요-넬슨 제독의 베개 - 히틀러와 기말고사

옥스퍼드 시간 여행이라는 거대한 세계의 초석이 된 단편. 부족한 시간과 잠, 잘못된 정보로 인한 혼란, 선한 의도가 불러오는 오해, 위기 속에서 영웅이 되는 선량한 보통 사람들, 던워디 교수와 인류애 넘치는 제자들, 세인트 폴 대성당 등등 앞으로 꾸준히 반복되고 확장될 테마들의 시작이라는 점에 의의가 있지만 혼자서도 충분히 기능하는 멋진 이야기다. 후기의 작품들보다 덜 다듬어진 거친 면도 단점이라기보다는 매력적으로 느껴지는 작품. 사도 바울(St. Paul)을 따라 다닐 예정이었던 주인공인 존 바솔로뮤는 나치 공습에 시달리는 런던에 준비도 없이 내던져진 탓에 시종일관 신경이 날카로우며 초기작인 만큼 좀 더 혈기 왕성하다. 이때만 해도 과거의 사건에 영향을 주지 않도록 중립적인 관찰자로 남아있어야 한다는 기본적인 규칙 정도는 확립되어 있지만 인과 모순이라든가 편차라든가 시공간의 완전한 붕괴로 인한 네트 고장 같은 무시무시한 개념은 제대로 도입되기 전. 덕분에 바솔로뮤는 후배들은 밤잠을 설쳐가며 몇 달씩 고민하게 될 실수들을 마구잡이로 저지르면서도 인과 모순에 대한 고민은 그다지 하지 않으며, 과거의 인물과 치고박고 싸우는 것은 물론 지도 교수에게 주먹까지 날린다. 역사학자라면 부딪힐 수 밖에 없는 한계와 제약 앞에서 결국 지극히 인간적인 선택을 내리는 키브린과 바솔로뮤는 오랫동안 내가 가장 좋아했던 시간 여행자. 룸메이트라는 설정에도 불구하고 [둠즈데이 북]과도, [개는 말할 것도 없고]와도 거의 접점이 없었던 [화재 감시원]은 [블랙아웃]과 [올 클리어]에 와서 나치 공습중의 런던이라는 시공간대를 공유하면서 다시 강한 연결고리를 갖게 된다. 존 바솔로뮤가 과거에서 만난 에놀라, 랭비, 매슈 주임 모두 [올 클리어]에 다시 등장하는데 인사도 없이 떠나야 했던 그를 대신해 마치 우리가 대신 그들을 들여다보는 듯한 느낌. [화재 감시원]의 팬이라면 즐거울 수 밖에 없는 설정이다.  

그가 미소를 지었다. "생각해보면 나쁜 계획은 아니지. 물론 우리는 그런 일이 일어나게 내버려 두진 않을 거지만. 그게 화재 감시원이 여기 있는 이유잖아. 그런 일이 일어나는 걸 막으려는 거지. 안 그래, 바솔로뮤?"  내 실습의 목적을 이제는 안다. 나는 랭비가 세인트 폴 대성당을 불태워버리는 것을 막아야 하는 것이다.  

  • 존 바솔로뮤가 자신의 경험을 옥스퍼드의 다른 시간 여행자들에게 강의하다(2056-7)

[올 클리어]에 등장하는 설정이다. 주인공인 메롭은 1학년때 바솔로뮤의 강의를 (대충) 들었고, 그 덕분에 그가 옥스퍼드의 시간으로는 6년 앞서 있지만 시간 여행이기에 1940년의 런던에 자신들과 함께 존재하고 있음을 기억한다. [화재 감시원]이 시리즈에서는 [둠즈데이 북] 이후에 일어난 일이지만 먼저 쓰여졌기에 설정 충돌이 발생한다고 했는데 이것이 그 중 하나. [화재 감시원]에서 갑작스럽게 과제가 변경되어 속을 끓이던 바솔로뮤는 룸메이트인 키브린의 경험에 대해 어렴풋하게만 알고 있다. 시간 여행자끼리는 서로의 과제에 대해 묻지 않는 것이 원칙이기에. 또한 도착하고 한참 후에야 잘못된 시대로 왔음을 알게 된 [둠즈데이 북]의 설정과는 달리 [화재 감시원]의 키브린은 바솔로뮤처럼 과제가 변경되었음을 미리 알고 당황했다고 되어 있다. 마지막으로 [화재 감시원]은 옥스퍼드에서의 시간대가 설정되어 있지 않지만 [올 클리어]와 [둠즈데이 북]에 따르면 두 사람 모두 2054년 말에 시간 여행을 한 게 되는데 그렇다면 두 사람의 과제는 사실상 겹치게 된다. 키브린이 먼저 다녀오기에는 시간이 촉박하다는 뜻. 물론 공유 금지 원칙이 사라진 건 설정 오류가 아니라 바솔로뮤 항의 후 규정이 변경된 걸지도 모르겠지만, 어느 쪽이든 [개는 말할 것도 없고]에 이르면 역사학자들은 함께 움직이는데 별 다른 거리낌이 없어 보인다. [블랙아웃]과 [올 클리어]에서는 심지어 대여섯명의 역사학자가 던워디 교수의 허락 하에 같은 시공간대를 과제로 택했으며, 원한다면 과거에서 서로 만날 수도 있다.

다시 시공간대의 공유로 돌아가서, 존 바솔로뮤를 찾아 2054년의 옥스퍼드에 도움을 요청하자는 [블랙아웃]과 [올 클리어]의 주인공 에일린, 폴리, 마이클의 계획에는 한 가지 큰 허점이 있다. 그들이 성공한다면 그건 2054년의 제임스 던워디 교수는 6년 동안이나 자신의 제자들이 위험에 빠질 것을 알고 있었으면서도 그들을 1940년대로 보내버렸다는 뜻이 된다. 하지만 제임스 던워디가 과연? 과보호로 유명하고 전염병에 걸려 죽어가다 살아나자마자 생사 여부도 모르는 제자를 구하기 위해 직접 흑사병이 도는 중세로 찾아갔던 그가? 

  • 슈라프넬 여사가 조상의 일기를 읽고 코번트리 성당을 재건축하기로 마음 먹다(205?-2056)

[개는 말할 것도 없고]의 배경이 된 일이다. 2050년대 중후반 어느 시점에 미국인 재벌인 슈라프넬 여사는 자신의 먼 조상인 빅토리아 시대 영국인인 토시의 일기장을 읽고 1888년의 코번트리 성당을 완벽하게 재건해야겠다는 불타는 열망을 갖게 된다. 매우 부유한데다 강력한 의지를 가진 그는 옥스퍼드 대학에 거액의 후원금을 약속하고 시간 여행자들을 개인 비서처럼 부리게 되는데 제임스 던워디가 최고의 제자로 꼽는 네드 헨리와 베리티 킨들 역시 이 계획에 끌려들어가 각각 주교의 그루터기(매우 못생긴 일종의 거대한 화병이다)의 행방을 찾아내고 토시 메링의 일기장을 읽는 임무를 받았다. 두 사람의 나이는 정확하게 나오지 않지만 네드 헨리와 베리티 킨들은 어린 학부생이 아니라 대학원생이거나 박사 준비 중이 아닌가 하는 짐작을 해본다.   

  • 네드 헨리와 베리티 킨들이 빅토리아 시대로 떠나다(2057년/1888년)

[개는 말할 것도 없고]는 가장 밝은 분위기를 갖고 코믹한 부분도 많지만 읽기 쉬운 작품은 아니다. 전작들과는 달리 [개는 말할 것도 없고]는 인류애보다는 가설과 실험을 통한 시간 여행 이론의 진화가 매우 중요한 비중을 차지하기 때문. 주인공 베리티의 입을 빌어 아가사 크리스티와 도로시 세이어스에게 깊은 애정을 보여준 코니 윌리스는 [개는 말할 것도 없고] 역시 추리 소설처럼 구성했는데, 결코 말랑하지 않은 하드 SF와 추리소설의 조합이 매력적이면서도 녹록지 않은 작품. 이런 추리 소설적 구성은 [블랙아웃]과 [올 클리어]에도 그대로 이어진다. [개는 말할 것도 없고] 초반에서 정설로 받아들여지고 있었던 시간 여행 이론은 다음과 같다. 

  • 시간 여행자들은 과거를 여행할 수는 있지만 같은 시공간대에 두 번 존재할 수는 없다.
  • 시간 여행자들은 과거에서 어떤 물건도 가져 올 수 없다. 세균이나 바이러스도 마찬가지.
  • 시간 여행자가 가고자 하는 시공간대에 예상치 못한 변수(목격자 등)가 있어 인과 모순을 일으킬 수 있는 경우 네트는 시공간대를 재설정하는 '편차'를 통해 시간 여행자를 막는다. 즉 시간 여행자가 아무리 미래에서 설정을 하고 네트를 사용한다고 해도 엉뚱한 시간, 엉뚱한 장소로 보내진다는 것.
  • 아주 사소한 영향조차 결과를 뒤바꾸어놓을 수 있는 중요한 '분기점'인 경우(2차 대전 중의 덩케르크 등)에는 네트를 여는 것 자체를 불가능하게 하여 역사학자를 막는다. 
  • 그래도 역사학자가 심한 인과 모순을 일으킬 때에는 시간 편차가 증가하고 최악의 경우에는 시간 여행 자체가 불가능하게 될 지 모른다.

그러나 [개는 말할 것도 없고] 초반부에서 베리티는 무려 살아있는 생명체인 고양이 아주먼드 공주를 1888년에서 데려와 버렸고, 성실한 학자인 제임스 던워디 교수는 이에 맞춰 새로운 이론을 찾아 나선다. 제임스 던워디가 찾아간 후지사키라는 학자가 세운 가설은 다음과 같다.

  • 시공 연속체에서 중요하지 않은 물체나 사건에 대해서 모순은 일어나지 않는다. 시공 연속체는 혼돈계이기 때문에 어떤 대상이나 사건의 효과는 아주 커지는 반면 어떤 것의 효과는 사라지므로. 
  • 인과 모순은 일어날 수 있지만 현대의 네트에는 그 효과를 없앨 수 있는 방어 시스템이 이미 갖춰져 있다. 모순이 일어나서 편차가 위험한 수준까지 올라가게 되면 네트는 자동으로 닫히게 된다.
  • 만약 모순이 일어나면 또 다른 방어 장치가 있어서 모순을 바로잡고 모순 주변 영역에서 급격한 시간 편차를 일으켜 우연의 일치가 일어날 확률을 증가시킨다다.
  • 대부분의 모순은 50년 내에 교정되지만 모순이 아주 심각한 상태라면 네트는 붕괴할 수도 있다.

심각한 시차 증후군에 걸려 빅토리아 시대로 떠나기 전 네드는 동료인 캐러더스가 아무리 시도해도 1940년 11월 14일의 코번트리 성당으로 갈 수 없었다고 불평하는 것을 듣는다. 시공간 편차가 너무 심한 것이 원인이었다. 그러나 네드와 베리티는 이에 대해 별 다른 염려를 하지 않는다. 코번트리 성당 공습은 연합군과 나치의 정보 싸움에 중요한 역할을 했기에 분기점이고, 분기점은 원래 편차가 증가하므로. 그보다 1888년에 머무는 동안 네드와 베리티는 분기점이 아닌 2018년 4월의 옥스퍼드에 편차가 급격하게 증가했음을 알게 되고 자신들의 노력이 교정의 일부인지 아니면 인과 모순의 원인인지, 만약 그렇다면 완충 장치가 제대로 작용하고 있는지를 알지 못해 혼란에 빠진다. 그렇게 한참을 고군분투하던 두 사람은 네드가 포와로 못지 않은 추리력을 발휘해 2018년 4월 엘리자베스 비트너가 1940년의 코번트리 성당의 물건들을 훔쳐왔음을 눈치 채고 난 후에야 많은 모순과 편차들이 사실은 과거로 뻗어나간 네트의 자체 교정이었음을 알게 된다. 하지만 그렇다면 어째서 좀 더 간단한 교정이 이루어지지 않은 것일까? 연합군과 나치의 정보 싸움에 영향을 주지 않으려면 시간 여행자들이 복잡한 과정을 통해 막아야 했던 델피니엄 샤프라는 과거의 인물을 그냥 공습 중에 죽여버리면 될 것이 아닌가? [개는 말할 것도 없고]는 이 질문에 대한 답으로 2018년 4월의 일 역시 인과 모순이 아니라 미래에 일어날 어떤 일 때문에 생겨난 네트의 자체 교정이었다는 결론으로 마무리된다. 주교의 그루터기라는 못생긴 물건은 어떤 이유에서인지 2057년의 옥스퍼드에 재건된 코번트리 성당에 있어야 했던 것이다.

나는 길을 건너기 위해 이곳에 수백 번도 넘게 서 있어 봤지만, 그때는 관광객용 쇼핑 센터와 지하철역이 있는 21세기의 옥스퍼드였다. 이곳이, 이곳이 바로 <태양 빛이 내리쬐는> 진짜 옥스퍼드, 뉴면과 루이스 캐럴과 톰 브라운이 있는 옥스퍼드였다. 하이 스트리트를 돌아서면 퀸스 칼리지와 막달렌 칼리지, 그리고 높다란 창과 체인 북이 가득한 구 보들리 도서관이 있었고, 그 옆에는 래드클리프 카메라 건물과 셸도니안 극장이 있었다. 그리고 브로드 스트리트 모퉁이를 돌면 베일리얼 칼리지가 영광스런 자태를 뽐내고 있었다. 매슈 아놀드, 제라드 맨리 홉킨스, 애스퀴스의 베일리얼이. 그리고 베일리얼에는 위엄 있는 목소리로 학생에게 <설명 말게. 변명도 말고>라고 말하던 텁수룩한 백발의, 저 위대한 자우잇이 있었다. 

기술적인 면이 중요하긴 하지만 [개는 말할 것도 없고]는 혼란스러운 상태에서 읽어도 재밌는 책이긴 하다. 여러모로 우스꽝스러운 시대였던 빅토리아 시대의 자세한 묘사부터, 30년대 추리 소설들에 대한 오마쥬, 그리고 코니윌리스가 제목을 따 온 제롬 K. 제롬의 [개는 말할 것도 없고]와의 크로스오버까지 모두 갖췄기에. 키브린이나 바솔로뮤와의 모험과는 달리 시간 여행자들이 과거에 만난 인물들이 위험에 빠져있지 않은 것도 마음을 편하게 해준다. 테렌스와 시릴은 행복하게 잘 살았을 것이다. 토시와 C씨도. 그리고 아주먼드 공주도.

  • 이시카와 박사가 [시간 여행의 임박한 위협]이라는 책에서 새로운 시간 여행 이론을 제시하다

원래 있던 이론인지 아니면 새로 등장한 이론인지는 모르겠지만 [블랙아웃]의 초반부에 17살의 콜린은 [시간 여행의 임박한 위협]라는 이론서에 대해 던워디 교수에게 불평을 늘어놓는다. 이시카와 박사의 주장은 다음과 같다. 시공간 편차는 기존의 믿음과는 달리 역사학자가 사건들에 영향을 미칠 수 있는 시공간에 가지 못하게 하는 게 아니라 뭔가 잘못되었다는 증후다. 아직까지 그 영향을 볼 수 없는 건 시공간 연속체가 변화를 취소할 수 있기 때문이며, 영원히 그럴 수는 없기에 과거로 시간 여행자를 보내는 일을 즉시 중단해야 한다. [개는 말할 것도 없고]와 [블랙아웃]과 [올 클리어]는 이 주장을 검증해보는 실험이라고 볼 수 있다.     

  • 여러 명의 시간 여행자들이 2차 대전을 관찰하기 위해 떠나다(2060년/1939-1945)

1939년부터 1945년까지 2차 세계 대전 당시의 영국이 무대가 되는 코니 윌리스의 마지막 두 소설은 상편 하편이 아니라 하나의 책으로 봐야 한다. 한 역사학도가 몇 주간 한 곳을 둘러보고 제임스 던워디 교수는 오로지 한 학기에 한 지도학생만을 받는 듯하던 개인 교수식 설정은 [개는 말할 것도 없고]에서 이미 깨어졌는데, [블랙아웃]과 [올 클리어]는 완결판답게 훨씬 더 야심찬 규모를 갖고 있다. 글의 시작 부분에서 이미 최소 5명의 학생들이 2차 세계 대전을 주제로 실습을 준비 중이며, 과거에서 온 옥스퍼드의 다른 역사학자 선배들 역시 1940년의 영국에 함께 존재하고 있다. 주인공인 에일린, 마이클, 폴리과 인연을 맺게 되는 중요한 비중의 과거의 사람들까지 등장하고 나면 정말 사람들로 버글거리는 느낌. 거기다 편리하게도 전시 상황 + 시간 여행이라는 설정이 합쳐져 온갖 가명에 별명까지 쏟아져나오면서 정신이 없으니 너무 헷갈린다면 메모장을 들고 등장 인물을 모조리 적어가며 읽는 것도 괜찮은 방법이다. 그리고 그게 바로 내가 지금 할 일.

  • 폴리 처칠이 2차 세계 대전 중의 영국으로 실습을 떠나다(2060년 3월/1944년 6월 13일-1945년 5월 7일)

 세 명의 주인공 중 가장 먼저 2차 대전 중의 영국을 관찰하고 온 사람은 스물 다섯 살의 폴리 처칠. 그는 던워디 교수가 편차를 염려해 다른 역사학자들의 과제를 모두 시간 순으로 재배치 하기 전, 1944년의 영국 덜위치에서 응급 간호사 부대원으로 근무하며 그들의 삶을 관찰하는 과제를 택했다. 폴리가 그때 사용했던 이름은 메리(폴리의 애칭) 켄트이며, 그는 1945년 5월 7일까지 남아 부대원들과 함께 트라팔가 광장에서 종전을 축하하고 돌아갔다. 이때 메리는 트라팔가 광장에서 메롭 워드를 보는데 밝은 초록색 코트를 입은 메롭은 그를 보지 못한다. 또한 메리는 1944년 폭격 현장에서 두 명의 민간인을 구하려고 하지만 한 명은 그 자리에서 사망, 살아있었던 한 명은 다른 지역에서 온 응급 부대원에게 인계된다. 오토바이 소리를 미사일 소리로 착각한 해프닝 때문에 부대원들은 폴리를 더글라스, 드 하빌랜드, 트라이엄프 등의 별명으로 부르기도 한다. 

  • 메롭 워드가 2차 세계 대전 중의 영국으로 실습을 떠나다(2060년 4월 이전/1939년 12월 이전-)

빨간 머리의 메롭 워드는 마이클과 폴리보다 어리며, 첫 번째 시간여행이라는 것으로 미루어보아 20대 초반으로 추정된다. 20세기에 유행하는 이름인 에일린이라는 가명으로 시골로 피난 온 영국 아이들을 관찰하는 과제를 맡은 그는 백베리의 대저택에서 수십 명의 아이들을 돌봐야 할 뿐아니라 비니와 알피 호드빈이라는 끔찍한 남매에게 시달리며 온갖 고생을 하게 된다. 메롭이 다음 과제로 염두에 두고 있는 것은 전승 기념일 관찰인데 2060년의 4월 옥스퍼드에서 만났을 때 폴리는 메롭의 마음이 상할까 봐 자신이 전승 기념일 과제를 먼저 했음을 말하지 않는다. 공습이 거의 없었던 시골에 머무를 예정이었기에 메롭은 런던 폭격에 대해서는 아무것도 모르는 상태나 마찬가지. 과제 중 메롭은 코니 윌리스의 시간 여행자답게 위기 상황에서 많은 아이들의 목숨을 구하고 이들의 운명에 개입했다는 불안감에 빠진다.  

  • 마이클 데이비스가 2차 세계 대전 중의 영국으로 실습을 떠나다(2060년 4월/1940년 5월 29일-)

2차 대전 중 위기 상황에서 용기를 발휘한 평범한 사람들을 관찰하는 과제를 맡은 마이클 데이비스는 이식한 미국 억양을 여러 번의 미션에 사용하기 위해 순서를 잘 짜놓지만 던워디 교수의 갑작스러운 재배치로 인해 덩케르크 과제를 먼저 하게 된다. 덩케르크는 역사상 가장 중요한 분기점이기 때문에 그는 도버에서 미국 기자 신분으로 군인들의 구출을 관찰할 예정이었지만 시공간 편차로 인해 샐트램-온-시에 떨어진 후 역사학자로서는 가장 해서는 안 될 일에 휘말리고 만다. 덩케르크에서 죽었어야 할 군인들 수백명을 구해낸 것이다.

  • 폴리 처칠이 2차 세계 대전 중의 영국으로 실습을 떠나다(2060년 4월/1940년 9월 14일-)

폴리의 두 번째 과제로서 1940년 겨울 대공습 중의 런던에서 백화점 점원으로 일하게 된다. 시기가 시기인만큼 폴리 처칠이 아닌 폴리 세바스찬으로서 나치의 폭격을 이겨낸 평범한 런던 사람들의 용기를 6주간 관찰하고 돌아올 예정이었지만 마이클과 마찬가지로 폴리 역시 시공간 편차로 인해 원했던 시간보다 뒤인 1940년 9월 14일 토요일에 켄싱턴으로 떨어져 방공호에 대피 중이던 사람들과 친분을 쌓게 된다. 폴리 역시 과거에 머무는 시간이 길어지면서 자신이 만난 사람들에게 운명을 바꿔놓게 되고 그 결과를 걱정하게 된다. 

  • 2060년의 던워디가 폴린을 데려오기 위해 떠나다(2060년 4월/1940년 9월 10일)

메롭과 마이클, 폴리가 애타게 기다리는 동안 이시카와 박사를 만나기 위해 자리를 비웠던 던워디 교수는 옥스퍼드로 돌아 온 후 폴리가 1944년에 먼저 갔다왔다는 것을 알게 되자 곧바로 1940년 9월의 런던으로 떠난다. 던워디가 걱정하는 것은 폴리의 데드라인으로 이시카와 박사의 이론이 맞다면 네트에 문제가 생길 경우 3년의 시간은 부족하다고 판단한 것이다그러나 [둠즈데이 북]과 [개는 말할 것도 없고]에도 등장했던 네트 기술자 바드리는 던워디를 1940년의 9월 10일로는 보내고 싶어하지 않는데 그 역시 18살에 1940년 9월 17일의 런던으로 다녀온 적이 있기에 데드라인이 있기 때문. 던워디는 몇 시간이면 될 거라는 말로 바드리를 안심시키고 떠난다. 이번에는 콜린이 절대 따라오지 못하게 하라는 엄격한 지시를 내리고.

  • 1940년의 영국으로 간 시간 여행자들이 과거에 갇히다(1940년-)

전작인 [개는 말할 것도 없고]에서 네드와 베리티, 그리고 캐러더스는 이미 인과 모순이 일어나는 경우 네트가 일어나지 않는 일을 경험하지만 이는 일시적인 현상이었고 결국 네트의 자체 교정이었던 것으로 마무리 된다. 그러나 [블랙아웃]과 [올 클리어]에 와서 주인공들은 훨씬 더 긴 시간 동안 과거에 완전히 갇히게 되고 구조대가 도착하지 않자 자신들이 역사에 지나치게 개입한 나머지 옥스퍼드에도 문제가 생겼을지 모른다는 걱정을 하게 된다. 이런 상황에서 메롭과 폴리, 마이클은 쉴 새 없이 서로를 구하기 위해 노력한다. 특히 폴리의 데드라인이 1944년이라는 것을 알게 된 메롭과 마이클은 선량한 미래인들답게 어떻게든 폴리라도 먼저 탈출시키기 위해 애를 쓴다. 그들이 생각해 낸 방법은 다음과 같다.

  1. 2060년의 옥스퍼드에서 2차 대전을 과제로 선택한 다른 역사학자들을 찾아서 그들의 강하 지점을 이용한다. 1940년 12월까지 암호 해독가들과 수학자, 여성 직원들이 나치의 암호를 풀기 위해 함께 일했던 블렛츨리 파크에 머물기로 한 제럴드 핍스가 가장 이상적인 선택이지만 안 되면 1944년 3월에 도착할 데니스 애쉬턴도 있다. 폴리의 데드라인과 지나치게 가깝긴 하지만 네트가 열리기만 하면 되니까.
  2. 옥스퍼드의 시간대에서 먼저 1940년대의 영국으로 떠났던 선배 시간 여행자들을 찾아 그들의 강하 지점을 이용하거나 던워디 교수에게 메시지를 전한다. [개는 말할 것도 없고]의 네드와 베리티는 1940년 11월에 코벤트리 성당에 있었고, [화재 감시원]의 존 바솔로뮤는 1940년 9월 20일부터 12월 31일까지 런던에서 세인트 폴 대성당의 화재 감시원으로 일했으니 그들을 만나기만 하면 되는 것이다. 그러나 이 계획에는 문제가 있는데, 위에서도 말했듯이 이 계획이 성공했다면 던워디 교수는 길면 6년, 짧게는 3년 동안 2060년에 제자들이 위험한 상황에 빠지는 것을 알고도 과제를 허락했다는 뜻이 된다. 과보호적인 던워디 교수의 성격을 알기에 세 주인공 모두 큰 기대를 걸지 않지만 서로를 위해 말하지 않는다. 
  •   콜린이 시간 여행자들을 찾아 나서다(2060-)

던워디 교수가 돌아오지 않자 17살의 콜린은 던워디와 시간 여행자들을 찾아 나선다. [블랙아웃] 초반부에서 연상의 폴리에게 홀딱 반해 시간 여행을 통해 나이를 맞춰 오겠다고 다짐하던 콜린의 말은 훨씬 더 암울한 상황에서 이루어지게 된 것. 아무리 애를 써도 2040년부터 2041년 3월까지는 네트가 열리지 않자 콜린은 전쟁 기밀 문서가 공개되기 시작한 1976년부터 1995년까지 수많은 시간 여행을 떠나 각종 기록을 뒤지며 과거에 갇힌 시간여행자들을 구해내기 위해 전심전력을 다한다. 캘빈 나이트(기사)라는 적절한 가명을 사용하며. 

  •  시간 여행자들이 또 한 번 과거에 개입하다(1940년 12월 31일)

존 바솔로뮤가 2054년으로 떠나는 날인 12월 31일 간발의 차이로 세인트 폴 대성당에서 그를 놓친 메롭과 폴리, 마이클은 또 한 번 과거 사람들의 삶에 지나치게 개입하게 된다. 메롭은 호드빈 남매들과 함께 구급차를 몰며 수많은 사람들을 구해내게 되고, 마이클은 소방관들의 목숨을 살리게 된다. 폴리는 던워디 교수를 본다.

  • 마이클은 스파이가 되다(1941-1944)

존 바솔로뮤를 아슬아슬하게 놓친 후 아무런 대책 없이 폴리의 데드라인이 점점 다가오자 다른 마이클은 과감한 결정을 내린다. 자신의 죽음을 가장하고 혼자서 1944년에 올 데니스 애쉬턴을 찾아내기로 한 것. 메롭과 폴리는 큰 충격에 빠지지만 유일한 보호자인 엄마를 잃은 호드빈 남매의 후견인이 되어 꿋꿋하게 살아간다. 

마이클은 덩케르크에서 입은 부상 때문에 입원했던 병원에서 만난 군인에게 차출되어 영국 정보부에서 일하게 된다. 1944년까지 영국에 머물면서 노르망디 상륙 작전을 성공시키기 위해 수많은 거짓 정보를 흘렸던 포티튜드 사우스 작전에 참여한 마이클은 독일군을 속이기 위한 가짜 기사들을 쓰는 틈틈히 미래의 역사학자들이 알아 볼 수 있을 만한 암호화 된 단서들을 신문에 계속 싣는다. 정보부는 신분을 숨기기 위해 오스카 와일드의 희곡 [Importance of being Ernest]의 등장인물들 이름을 사용하는데 마이클의 코드명은 주인공 어니스트 워딩. 역사상 가장 치밀한 기만 작전 중 하나였던 포티튜드 사우스를 묘사하는 부분은 매우 흥미롭다.

  • 콜린이 마이클을 찾아내다(1944)

마이클의 노력은 효과가 있었다. 기밀이 해제된 1976년부터 모든 신문을 샅샅이 뒤지던 콜린은 마이클이 44년에 보낸 메시지를 접한 후 응급 구조대로 가장하고 1944년 그를 찾아낸다. 던워디 교수와 폴리의 사망 기사를 봤지만 희망을 버리지 않고 있었던 콜린은 이때 마이클로부터 메롭과 폴리가 1941년에 살아 있었다는 말을 듣게 되고 좀 더 정확한 시간대로 그들을 찾으러 갈 수 있게 된다. 그러나 심각한 부상을 입었지만 자신이 아는 정보를 모두 말해주기 위해 옥스퍼드로 옮겨지기를 거부했던 마이클은 사망하고 만다. 콜린이 마이클을 찾아내기 전 그를 구하기 위해 애를 쓰고 있었던 구급 대원 메리는 1944년 과제 중이었던 폴리였고 마이클은 죽어가면서 1941년으로 가지 말라는 말을 해주기 위해 애를 쓰지만 폴리는 끝내 그를 알아보지 못한다. 

  • 폴리가 던워디 교수를 만나다(1941년 12월)

 41년 12월이 되서야 폴리는 세인트 폴 대성당에서 애타게 기다리던 던워디 교수를 다시 만나지만 염려하던 일이 실제로 일어났음을 확인 받을 뿐이다. 던워디 교수는 초반에 소개된 이시카와 박사의 이론을 다시 한 번 이야기하며 편차는 지금까지 믿어왔던 것처럼 시간 여행자가 일으킬지 모르는 모순을 방지하기 위한 장치가 아니라 이미 시공간계가 침범된 후에 막아보려는 후위 공격였다는 말을 한다. 그러나 편차만으로는 막을 수 없을 만큼 파괴가 심각해지면 시공간은 오염된 부분을 폐쇄시켜 시간 여행자들을 과거에 가두고 역사는 변경되기 시작한다고. 전작들에서 시간 여행자들이 두려워했던 일이 이번에는 정말 일어난 것이다.

그러나 메롭은 이런 암울한 결말을 믿지 않는다. 전쟁 중의 영국에서 많은 경험을 했지만 여전히 낙천주의자인 메롭은 역사학자들이 선한 의도로 구한 생명들이 나쁜 결과를 불러올 수 있다는 이론을 거부하고 끝까지 희망을 가져야 한다고 주장한다. 마이클의 죽음을 믿지 않았듯이. 그리고 폴리는 결국 메롭이 맞았음을 알게 된다. 네트가 열리지 않고 편차가 생긴 이유는 그들이 역사를 바꾸지 못 하기 위함이 아니라 오히려 그 반대였던 것이다. 시간 여행자들은 정확히 자신이 지금 있는 자리에 있어야 했다. 나치의 공습이 한창인 영국에. 인류 최악의 전쟁이 될 뻔 했던 2차 세계 대전을 승리로 이끌고 시간 여행 이론이 발견되기 위해. 그들 뿐만 아니라 모두가 그랬다. 집에 가기 싫다고 극장에서 울음을 터뜨린 테어도어도, 가는 곳마다 사건사고를 일으키며 어른들을 미치게 만들었던 호드빈 남매도, 자전거로 사람을 마구 치고 다녔던 앨런 튜링도, 목숨을 걸고 구급차를 운전했던 여성들도. 그리고 앞의 시간여행자들이 그랬듯 던워디 교수도 메롭도 폴리도 자신들의 임무가 끝나면 집으로 돌아갈 수 있을 것이다. 

  • 콜린이  에일린을 만나다 (1995)

구출 작업에 매달리며 자신의 시간대에서 20대 후반이 된 콜린은 1995년 왕립 전쟁 박물관에서 열린 2차 대전 전시에서 드디어 중년의 여성이 된 에일린을 만난다. 다만 이 에일린은 메롭 워드가 아닌 그의 이름을 물려받은 비니 호드빈이었고, 이미 마이클의 죽음을 눈앞에서 봐야 했던 콜린은 자신을 기다리던 에일린이 1987년에 암으로 세상을 떴다는 충격적인 소식을 듣게 된다. 10년간의 노력에도 불구하고 그가 너무 늦은 것인가? 40년대의 영국을 끔찍하게 싫어했던 에일린은 절망과 슬픔 속에서 죽었고, 던워디 교수와 폴리는 생각했던 대로 공습 중에 사망한 것인가? 그러나 비니는 자신을 입양해서 친자식처럼 키워 준 에일린의 삶이 충만하고 평화로운 끝을 맞았다고 전한다. 부랑아가 될 뻔했던 알프는 커서 판사가 되었으며 에일린은 남편 사이에 메리라는 다른 딸을 낳았다고도. 그리고 가장 중요한 것은 비니는 어린 시절 콜린을 만난 적이 있다. 콜린은 결국 그들을 찾아낸 것이다. 사실 그들은 서로를 찾아냈다. 메롭의 죽음 이후 알프와 비니는 메롭의 임무를 물려 받고 2차 대전에 관련된 모든 전시에 찾아가 콜린을 기다렸다. 메롭과 마이클의 희생과 호드빈 남매의 집요한 노력 덕에 결국 콜린은 폴리와 던워디를 구할 수 있게 된다.

  • 콜린이 폴리와 던워디를 찾아내다 (1940년 4월)

시공간계에서 맡은 임무를 다 하고 나면 집으로 갈 수 있으리라던 폴린의 예상은 맞았다. 비니의 도움 덕에 콜린은 그동안 열리지 않았던 세인트 폴 대성당의 던워디 교수의 강하지점을 이용해 마침내 그들을 찾으러 온다. 지쳤고 슬프지만 끝까지 희망을 버리지 않은 채. 그리고 콜린을 만난 후 에일린은 자신이 과거에 남아야 함을 깨닫는다. 단지 미래에 콜린에게 자신들을 찾으러 오라는 말을 하기 위해서만은 아니다. 이 부분에서 코니 윌리스는 콜린 템플러가 메롭 워드의 후손임을 강하게 암시한다. 단서는 여러가지다. 95년도에 비니가 먼저 콜린을 보고 깨달음을 얻고(콜린과 공유하지는 않는다) 메롭에게 각별한 의미를 가지고 있을 메리(폴리의 별명)라는 이름은 2-3 세대를 거쳐 [개는 말할 것도 없고]에서 콜린의 이모 할머니인 메리 아렌스 박사에게로 이어진다. 마지막으로 옥스퍼드로 돌아가기 직전 폴리는 콜린의 얼굴에서 메롭과의 유사성을 보고(콜린을 너무 닮아 폴리를 당황하게 했던 1944년의 스티븐 랭은 맥거핀) 메롭이 헤어지면서 언제나 함께 할 거라고 했던 말의 의미를 이해한다. 에일린의 마지막 임무는 아직 끝나지 않은 것이다.

  • 메롭이 폴리에게 작별 인사를 하다(1945년 5월 7일)

메롭은 이미 폴리가 전승기념일 날 트라팔가 광장에서 자신을 봤지만 이야기를 나누지는 못 했다는 사실을 알고 있다. 그러나 이제 알프와 비니의 엄마가 된 메롭은 밝은 녹색 코트를 입고 광장으로 간다. 마지막으로 폴리를 보기 위해. 그리고 인파 사이로 사라지는 폴리를 바라보며 생각한다. 오 폴리, 우리는 정말로 좋은 친구가 될 거야. 폴리를 보낸 후 메롭은 피난민 아이들을 돌볼 때 자신에게 큰 도움이 되어주었던 친절한 구드 목사를 다시 만난다. 95년 비니의 별명이 '구디 투 슈즈'인 것으로 보아 구드 목사와 메롭은 아마도 결혼했을 것이다.

  • 같이 보면 좋은 작품

[블랙아웃]과 [올 클리어]를 읽고 나서 찾아볼 만한 작품 중 제일 추천하고 싶은 것은 2차 대전 중 나치의 암호 해독을 위해 블랫츨리 파크에서 일했던 여성들이 전쟁이 끝난 후 범죄를 해결하는 내용의 [블랫츨리 써클]. 여성 팬들에게 매우 인기가 높은 시리즈임에도 2시즌 밖에 없어서 아쉬웠는데 얼마 전 샌프란시스코로 무대를 옮겨 3시즌이 제작되었다는 기쁜 소식을 들었다. 2차 대전 중 전투기를 수리했고 파일럿들에게 전달해줬던 영국 여성들의 삶을 다룬 [스핏파이어 우먼]도 좋은 다큐이며, 앨런 튜링의 삶을 다룬 [이미테이션 게임]이나 조지 왕이 주인공인 [킹스 스피치], 처칠 전기 영화 [다키스트 아워]등도 모두 같은 시대를 다루고 있다.   

 코니 윌리스는 이 작품의 영감을 911 테러 사건이 터졌을때 쌍둥이 빌딩 안의 엘리베이터에 갇혀 밖에서 무슨 일이 일어나는지 알 수 없는 채로 두려움에 떨었던 생존자들의 이야기에서 얻었다고 한다. 그러나 [블랙아웃]과 [올 클리어]는 공포와 슬픔만을 이야기하지는 않는다. 시간 여행 시리즈의 다른 모든 작품들처럼 이 책 역시 용기와 희망, 인간에 대한 애정으로 가득한 이야기다. 2011년 설 연휴를 맞아 여행을 떠나는 사람들로 가득한 기차 안에서 손을 떨어가며 열심히 읽고 몇 년간 이야기를 해왔기에 [블랙아웃] 번역본이 나왔을 때 다시 읽으면 감동이 덜할 거라고 생각했지만 오산이었다. 많은 부분을 잊어버린 탓이기도 하다. [블랙아웃] 번역본을 밤을 새가면서 다시 읽고 결국 [올 클리어] 원서까지 몇 년만에 꺼내 읽으면서 얼마나 놀랬던지. 30% 정도는 아예 기억에서 날아가고 없었다. 그리고 나는 시간 여행자는 아니지만 이것만큼은 확실히 알 수 있다. 몇 년이 지나면 나는 분명히 또 까먹는다. 그때가 되면 과거의 내가 정리해 둔 이 글에 감사하게 되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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