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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소리 없음에 대하여

브라이트 스타


벤 휘쇼의 36번째 생일을 기념하여 쓰는 글이지만 사실 [브라이트 스타]는 내가 가장 좋아하는 벤 휘쇼의 작품 중 하나인 동시에 가장 그에 대해 생각하지 않게 만드는 작품이기도 하다. 대부분의 경우 나는 이 배우의 재능에 매료되어서 넋을 잃어버리기 때문에 이런 일은 매우 드물게 일어나는데, 왜 [브라이트 스타]를 볼 때만큼은 그를 살짝 (완전히는 불가능하다. 그러기에는 나는 벤 휘쇼를 너무 집착적으로 사랑한다.) 뒷전으로 밀어내게 되는 걸까. 이유는 간단하다. [브라이트 스타]는 벤 휘쇼가 맡은 존 키츠에 관한 작품이 아니기 때문이다. 이 영화는 존 키츠의 연인이었던 패니 브로운에 대한 이야기다.


 [브라이트 스타]를 보고 난 후 왜 존 키츠 전기 영화가 아니냐고 불평했다는 사람들이 있다는 것은 놀랍다. 아니, 사실은 안 놀랍다. 안 놀라운 일에 자꾸 놀란 척 하는 것도 지겹다. 다소 악의적으로 짐작컨대, 나는 불평을 한 사람들 중 많은 수가 사실은 이렇게 말하고 싶어 했다고 생각한다. "왜 유명한 시인인 키츠가 아닌 그의 별 볼일 없는 애인 얘기를 하는가?". 그들에게 해 줄 수 있는 말은 하나 뿐이다. "안 될 건 뭔가?" 키츠가 패니에게 보낸 편지들은 너무나 유명해 그의 시를 모르는 사람들도 그가 여하튼 약혼녀에게 열심히 편지를 써 보낸 사람이라는 것은 안다. 하지만 패니가 그에게 보낸 편지는 어떨까. 활발한 편지 교환으로 유명한 연인치고는 놀랍게도 패니가 키츠에게 보낸 편지는 단 한 통도 남아있지 않다. 그러니 여성 관객인 나로서는 여성인 감독이 왜 이런 선택을 했는지는 명백해 보인다. 키츠의 때 이른 죽음 이후 그의 친구들과 평론가들에 의해 처음에는 재능 있는 젊은 시인에게 어울리지 않는 부족한 짝, 심지어는 그의 죽음을 재촉한 끔찍한 악연으로까지 낙인 찍혔다가 후에는 지고지순한 연인이자 성녀로 박제되어버린 패니 브로운에게 목소리를 돌려주자는 것 아니겠는가.  

이를 위해 [브라이트 스타]는 먼저 그녀의 목소리 없음을, 더 정확하게는 목소리를 빼앗기는 모습을 반복적으로, 매우 섬세하게 그려낸다.  남성적 목소리로서 남성들이 지배하고 있던 문학을 대변하는 키츠의 후원자이자 친구인 찰스 브라운은 등장부터 패니의 "가벼움"을 조롱하고 비난한다. 그는 너무나 집요하게 적대적이며, 그렇기에 오히려 패니의 존재를 그 누구보다도 필요로 하는 것처럼 보일 지경이다. 자신과 키츠가 하고 있는 일, 즉 진실한 예술을 창조한다는 행위의 영속적인 가치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세속적이고 경박한 것들, 곧 사라지고 없을 부질없고 거짓인 것들에만 관심이 있는 패니라는 열등한 비교 대상이 있어야 한다는 듯이. 키츠의 재능과 잠재력을 알아보고 격려하는만큼 열성적으로 패니를 깎아내리고 고의적으로 오독하는 브라운은 키츠에게 계속해서 경고한다. 저 여자와 함께라면 너는 절대로 니가 원하는 시인이 될 수 없다고. 너를 망쳐놓을 거라고. 그는 뛰어난 의복 디자이너인 패니 역시 예술가임을, 자신의 머리와 손으로 아름다움을 창조해내는 사람임을 절대로 인정하지 않는다. 

이 영화의 가장 흥미로운 지점은 자신을 악의적으로 해석하고 재창조하는 남성에게 맞설 수 있을 만큼 자신감이 있어 보이던 패니가 어쩔 수 없이 침묵하게 되는 순간이다. 패니는 실제로 목소리가 없는 인물은 아니다. 그는 소심하지도, 머뭇대지도 않으며 다른 사람들 앞에서는 브라운으로부터 일방적인 모욕을 받고 참고 있지도 않는다. 그러나 찰스 브라운이 조롱과 성적 모욕이 동시에 담긴 발렌타인 카드를 보내자 패니는 그만 말을 잃어버린다. 상처를 받은 키츠가 찾아와 진실을 말할 것을 요구할 때도 그는 침묵할 수 밖에 없다. 그리고 그런 패니를 비웃으며 브라운은 말한다. "저 여자는 새롱댈 줄이나 알고 바느질이나 할 줄 알지. 구혼자가 줄을 섰어. 어느 마을에나 저런 여자들은 있어." 라고. 브라운은  알고 있는 것이다. 패니에게 허락된 맞받아치기가 얼마나 제한적인지도, 그리고 누구도 젊은 여성에게 자신의 언어로서 진실을 솔직하게 말하는 법을 가르쳐 주지 않으며 허락하지도 않는다는 것도. 브라운은 패니의 언어 없음, 목소리 없음을 잘 알고 있기에 남성에게만 허용된 방식인 글과 성적 암시로서 패니의 "기를 꺾어놓고자" 하는 것이다. 그래서 키츠를 포기하도록. 상처 받아 떠나는 패니에게 대고 그는 다시 한 번 모욕을 가한다. 밀튼의 시에는 운율이 없다고, 시에 대해서 당신이 뭘 아냐고. 패니에게 마음을 빼앗겼으며 그의 장점을 알아보는 키츠조차도 패니의 좌절감과 모멸감을 제대로 이해하지는 못한다. 

그러나 찰스 브라운에게는 안 된 일이지만, 패니와 키츠는 결국 정교한 언어의 도움 없이도 서로의 마음을 이해한다. 폐결핵으로 죽어가는 동생 톰에 대해서 페니가 물어보자 키츠는 이렇게 답한다. "내 동생에 대해서 묻지 말아주십시오. 내가 할 수 있는 말은 내가 그를 사랑한다는 것 뿐입니다." 그후 톰이 끝내 세상을 뜨고 자신의 가족을 찾아 온 키츠에게 패니는 밤새 수를 놓은 베갯잇을 선물하고 키츠는 이 베갯잇에 입을 맞추는 것으로 감사 인사를 대신한다. 찰스 브라운이 시끄럽게 방해하기 전까지 고의적으로 정적인 상태로 지속되는 이 장면에서 두 사람이 나누는 대화는 세네마디를 넘지 않으며, 서로의 마음을 확인한 후에도 키츠는 패니에게 긴 편지를 쓸 필요가 없다고 말한다. 단지 내 베개 밑에 둘 굿 나잇 한마디면 충분하다고. 영화는 키츠가 패니에게 보낸 유명한 편지들도 많이 인용하지 않는다. 오히려 일부러 자제하는 듯이 보일 정도. 그리고 병이 깊어진 키츠가 이탈리아로 떠나자 [브라이트 스타]는 처음처럼 패니의 이야기로 되돌아온다. 그의 안타깝고 유명한 죽음마저도 우리는 패니의 시각을 통해서 보게 되며, 영화의 마지막 역시 키츠가 아닌 패니 브라운이 '브라이트 스타'를 읊는 모습으로 끝난다. 


실존 인물, 특히 목소리가 많이 남아있지 않은 실존 인물에 대한 이야기를 만들 때 창작자는 재현보다는 창작에 가까운 수많은 결정들을 내릴 수 밖에 없으며, 많은 경우 이 선택들은 소재가 되는 실존 인물보다는 창작자에 대해서 더 많은 것을 알려주게 된다. [브라이트 스타]는 이를 명확하게 인지하고 있을 뿐만 아니라 적극적으로 받아들이고 있기에 조용하게 전복적이며 고요하게 대담하다. 여성 독자들이 고전을 대하는 방식을 연구한 학자 헬렌 톰슨에 따르면 고전을 대할 때 여성들은 두 가지 충동에 동시에 시달리게 된다고 한다. 하나는 여주인공들을 구시대의 억압에 맞설 만큼 활기차고 재기발랄한 인물들로 다시 쓰고 싶은 충동이고, 다른 하나는 그들이 힘겹게 나름의 방식으로 맞서고 있는 시대적 제약을 인정하고 그들이 침묵하도록 내버려두고자 하는 충동이라고. [브라이트 스타]가 왜 키츠에 관한 이야기가 아닌가라는 질문은 어리석은 것이지만(그의 목소리는 편지부터 친구들의 기록, 수많은 평전에 아직도 생생하게 살아있다. [브라이트 스타]가 못마땅한 사람들은 옵션이 잔뜩 있으니 뭐든 정해서 뛰어들면 될 노릇이다.) 왜 메리 울스턴크래프트나 하다못해 억압적인 아버지로부터 대담하게 탈출했던 시인 엘리자베스 바렛이 아닌 결국 키츠의 뮤즈로 남은 패니 브로운를 택했는지는 던져볼 만한 질문이며, 나는 답이 위에서 언급한 저 두 가지 충동을 조화시켜보려는 욕구에 있는 게 아닐까 생각한다. [브라이트 스타]는 실제로도 키츠의 죽음을 오랫동안 애도했으며 자신이 처한 환경(오스틴의 시대이기도 한 섭정 시대 영국)이 요구하는 여성으로서의 삶을 살았던 패니 브로운에게 남성의 언어를 쥐어줌으로써 찰스 브라운으로 대표되는 지배적 남성에게 동등하게 맞서게끔 하지는 않는다. 그것은 당시에 어린 남동생(패니가 출연한 거의 모든 장면에 함께 나오는 토마스 생스터가 너무나 귀엽고 의젓하게 연기한 새뮤얼)을 동반하지 않고는 혼자 외출조차 불가능했던 패니 같은 여성에게는 거의 불가능한 일이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동시에 이 영화는 패니에게 바늘과 실, 그리고 쓰여진 글을 남기진 않았어도 살아서 생각했고, 움직였으며, 자신이 택한 사람과 사랑에 빠졌던 사람으로서의 목소리를 되살려줌으로써 패니를 침묵하는 뮤즈로 남겨두기를 거부하고 있다. [브라이트 스타]가 정확한 전기 영화가 아니라는 말에는 이의가 없다. 정확한 전기를 만들 수 있을만큼 패니 브로운에 대해 우리는 잘 알지 못하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나에게 [브라이트 스타]는 일종의 판타지처럼 느껴진다. 목소리 없이 묻혀 있던 여성이 일어나 말을 하기 시작하고 세상은 그의 말을 듣기 위해 조용하게 숨 죽이고 있는 멋진 판타지. 살아있는 키츠의 팬들이야 어떻게 느끼건 간에 죽은 패니 브로운이 되살아나 이 영화를 본다면 화를 내는 일은 없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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