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숲 속으로

에밀리 캐롤

에밀리 캐롤의  주인공들은 대부분 여자다. 어쩌다보니 그렇게 된 게 아니라, 작가가 의식적으로 설정했기 때문이다. 형제간의 살인을 소재로 한 <His face all red> 한 편 정도를 제외하고는 에밀리 캐롤의 이야기는 거의 모두 여성 화자의 시점에서 기술된다. 괴물도 여자고 신도 여자며, 연인들도 여자들이고, 친구들도 여자다. 그녀의 이야기들은 대체로 열린 결말을 지향하기에 스타일 면에서 전략적으로 우회적이지만 메시지는 결코 모호하지 않다. 에밀리 캐롤의 무시무시한 세계에서 여자들은 구원 받아야 할 제물이거나 피해자가 아니기에 아무리 무서워도 직접 움직여야 한다. 이상한 일이 생기면 직접 바닥까지 파헤쳐봐야 한다. 기다려도 구원해 주러 올 사람은 없기 때문이다.

종이책으로는 보여줄 수 없는 테크닉을 적극적으로 사용한 웹 코믹들로 인터넷 상에서 큰 호응을 얻었던 에밀리 캐롤의 첫 단행본 <Through the woods>는 그녀의 스타일이 종이책으로도 옮겨져도 여전히 매력적임을 잘 입증했다. 나는 몇 년 전에 그녀의 웹 코믹의 팬이 된 이후로 발간일만을 손꼽아 기다렸다가 아마존에서 바로 구입했는데, 조금도 과장을 섞지 않고 말하건대, 평생 소장할 만한 책이다. '알고보면 무시무시한 동화' 식의 변주를 좋아하지 않는 사람들도 (나도 그 중 한 명이다) 안심해도 좋다. 에밀리 캐롤은 주인공을 여자로 설정해서 충분히 격렬한 뒤집기를 시도하는 영리함을 보여주는 동시에, 동화들 특유의 풍부한 상징성과 어딘가 비정하게까지 느껴지는 무작위함의 매력을 십분 활용할 줄 아는, 장르에 대한 이해가 뛰어난 사람이기 때문이다. 올 컬러로 인쇄된 그림들도 매우 아름답다. 나는 아직도 웹상에 꾸준히 올라오고 있는 그녀의 작품들을 보고 있으면 늘 무언가 대단한 일이 일어나기 직전의 순간을 관찰하고 있는 기분이 든다. <숲 속으로>가 큰 호평을 받으면서 이미 충분히 대단해진 에밀리 캐롤이지만 앞으로 보여줄 것이 훨씬 더 많은 느낌이기에.

다음은 책과 웹 코믹을  모두 통틀어서 내가 특별히 더 좋아하는 작품들을 모아보았다. 괴담의 흉내만 낸 게 아니라 정말 무섭기 때문에 무서운 걸 못 보시는 분들은 클릭하기 전에 심호흡을 하시기를..!

1. 왕자와 바다 

책에 실리지 못해서 정말 아쉬웠던 작품. 나는 에밀리 캐롤을 인터넷에 널리 알렸고 웹에 올렸던 코믹으로서는 유일하게 책에도 실렸던 <his face all red>보다 이 작품을 훨씬 더 좋아했었다. 왕자의 사랑을 받기 위해 모든 것을 희생하는 인어공주 이야기가 고전의 위치를 차지하고 있지만 사실 그것이야말로 안데르센이 각색한 버전이니  인어에 대한 다른 이야기들보다는 역사가 오히려 훨씬 더 짧은 셈이다. 에밀리 캐롤은 좀 더 고전적인, 사람을 죽음으로 유혹하는 인어의 이미지를 되살려내어 순진한 왕자와 냉혹하게 자기 중심적인 인어의 이야기를 그려낸다. 종이 책으로는 전달할 수 없는 효과인 스크롤바와 페이지 넘김을 훌륭하게 사용한 작품으로, 다시 얘기하지만 정말 무섭기 때문에 심신이 미약하신 분들은 잘 생각하시고 궁금하신 분들은 위의 제목을 클릭하시면 되겠다.

2. Anu-anulan과 Yir의 딸

역시나 기대했으나 책에는 실리지 못하여 큰 아쉬움을 남긴 작품이다. 욕심 없는 착한 여인과 그녀와 사랑에 빠지게 된 여신의 이야기를 다룬 이 작품은 안젤라 카터가 세계 각국에서 여성이 중심이 되는 동화들을 편집한 후 소녀들을 위해 출간한 '비라고 동화집' 속의 이야기들을 강하게 연상시킨다.(우리 나라에는 '여자는 힘이 세다'라는 제목으로 나와 있다.) 유럽적 세계관이 아닌 다른 민족의 문화와 설화들에서 영감을 얻은 듯한 흥미로운 스타일에 웹 코믹 작가로 활동할 때부터 공개적으로 성 정체성을 밝히고 활동했던 에밀리 캐롤답게(그녀는 레즈비언이다. 부인과 결혼할 당시에도 역시 블로그에 알렸다.) 뚜렷한 LGBT 테마를 결합한 흥미로운 작품. 웹으로 봐도 쨍하게 살아있는 파란색을 기본으로 한 색감도 아주 예쁘다.

3. 내가 받은 세 가지 질문 

이 작품은 에밀리 캐롤의 꿈 저널 중 하나지만 완결된 이야기로 충분히 볼 수 있는 데다가 시처럼 아름다워서 좋아한다. 나는 고향으로 돌아가는 꿈을 꾸었다/학교에서 연설을 하기 위해/대신 나는 수녀를 만났고/우리는 결혼했다/결혼한 후 첫번째 밤 창 밖에서 불어들어온 차가운 바람은 우리의 딸이었고/두 번째 밤 복도에 서 있었던 늑대는 우리의 아들이었으며/아침이 되자/나는 악마 여인이 우리의 창을 지나며 노래를 부르는 것을 들었다/(그녀의 목소리는 애무와도 같았고)/나의 아내는 깨어나서 듣고 있었다/조용히/부드러운 눈빛으로. 멋져도 좀 너무 멋지지 않은가. 재능 있는 사람들은 꿈도 이런 꿈을 꾼단 말인가..?

4. 여자의 손은 차가웠다.

 책에만  실려 있었던 작품으로 푸른 수염류의 이야기를 전 부인의 유령과 현재 부인을 주인공으로 다시 써낸 이야기다. 여성들을 학대하거나 죽인 후에 은폐하려는 남성과 진실을 알게 되는 여성의 이야기는 에밀리 캐롤이 반복적으로 되돌아가는 주제로서, 그녀의 홈페이지에는 <out of skin>처럼 좀 더 노골적이고 잔인한 작품들도 실려 있다. 죽은 전 부인의 유령이 부르는 노랫소리를 듣고 슬퍼서 눈물 흘리는 사람이 오직 새로운 부인 뿐이라는 설정도 흥미롭고 끔찍한 내용과 아름다운 그림의 기묘한 조합도 멋지다. 푸른 수염이 사실은 ~오해 받은~ 남자였다는 류의 뒤집기가 아닌 남성의 폭력과 억압이 여성에게 주는 공포에 대해서 돌려가면서 말하지 않는 좋은 작품.

에밀리 캐롤의 웹 코믹들이 보고 싶은 분들은 여기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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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밀리캐롤 #페미니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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