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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성과 감성과 오만과 편견과 좀비와 시간여행 어쩌구 저쩌구

나는 극렬 제인 오스틴 순수 주의자로서 어떤 변형도 참지 못한다고 종종 농담을 하지만 이것은 사실 특정한 한 작품을 두고 하는 말이다. 다른 작품들은 굳이 찾아 읽을 정도로 흥미가 동하지 않을 뿐이지 삽으로 때리고 묻어준 다음 비석을 세워주고 싶은 기분이 들지는 않는다. BBC의 미니 시리즈 [로스트 인 오스틴]은 지금 희미한 기억만 남아있지만 그럭저럭 재밌었고 영화 [클루리스]는 [엠마]에 바치는 천재적인 오마쥬라고도 생각한다. 제인 오스틴과 그의 작품들을 소재로 하여 현대 여성들의 평행으로 그려낸 카렌 조이 파울러의 소설 [제인 오스틴 북클럽] 역시 매우 훌륭한 작품이다. 그렇기에 나는 [오만과 편견, 그리고 좀비]라는 작품이 이들 중 가장 활발하게 팔리고, 좋은 배우들을 써서 영화로까지 제작되는 기회를 잡은 것이 더더욱 이해할 수 없으며 누가 나에게 이 책을 추천할 때마다 비석 용으로 쓸 만한 좋은 돌을 찾아서 황야를 헤매고 싶은 열망에 시달린다. 이 책을 오마쥬라고 할 수 있는가? 오마쥬의 정의 자체가 원전에 대한 존경을 의미한다는 점에서 절대 그렇게 부를 수 없다. 이 책은 원전에 대한 이해 없이 명성만을 빌려 쓰고자 하는 의도가 너무나 분명히 느껴지며, 비웃는 눈과 조심성 없는 손으로 매우 정교하게 구축된 원전의 톱니바퀴를 엉성하게 분해하고는 재 조립하지 못해 그냥 내버려둔 게으르고 한심한 작품이다. 제인 오스틴이 현대에 살아서 티비쇼나 영화를 쓰는 작가였다면 '나쁜 팬픽의 예'로서 두고두고 들들 까이면서 놀림 받았을 것이나 죽은 천재는 말이 없고 저작권은 완료가 되며, 게으른 사람들은 어디에나 있어서 [오만과 편견]의 세계관과 인물을 그대로 쓰고 제목까지 따 왔으면서 원작을 한 번도 읽어보지 않은 사람들에게도 쉽게 다가가고 싶었다는 둥의 소리나 하는데도 돈을 끌어모으는 것이다.  이 작품이 왜 안 좋은 패러디의 전형적인 예인지 백 번째 설명하려니 너무 지겹지만 소녀들이 중국까지 무술을 배우러 떠날 수 있는 세상에서 한사 상속은 왜 남아 있겠으며, 베넷 가의 딸들 중 대부분은 결혼이 아닌 다른 방식의 경제적 자립이 가능해지는 순간 뒤도 안 돌아보고 집을 박차고 나가지나 않았을지 여부에 대해서 진지하게 생각조차 해보지 않은 사람이 무슨 패러디를 쓴단 말인가. 제인 오스틴은 죽기 얼마 전 완성한 마지막 장편 소설 [설득]에서 해군들이 한때 완고하게 그들에게 닫혀 있었던 더 높은 계층으로 보다 자유롭게 이동하는 것을 보여주면서 나폴레옹과의 전쟁으로 인해 변해가는 영국 사회의 모습을 보여주었다. 남자 형제들이 해군으로서 실제 나폴레옹과 싸웠기 때문에 제인 오스틴은 이런 변화를 누구보다 빠르게 감지했을 것이다. 그러나 그의 작품들은 두 챕터도 읽어본 적이 없는 사람들로부터도 '집안에서 일어나는 일만 다룬 가정 소설 비스무리한 어쩌구 아마츄어 어쩌구 로맨스만 나오고 어쩌구' 소리를 듣는다. 반면 무려 좀비가 등장하며, 여성들이 이를 물리칠 수 있는 무술까지 갖췄다는 설정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19세기에 쓰여진 원작에서 보여주었던 여성에 대한 경제적 사회적 억압은 그대로 둔 채 내용마저 기본적으로 똑같이 흘러가는 패러디 소설을 두고는 '기발'하고 '참신'하다고 칭찬이 쏟아지니 참으로 모를 일이다. 원작을 이해하지 못하는 패러디는 더 이상 패러디가 아니며, 그냥 못 쓴 오리지널 픽션이 아닌가? 오스틴 만큼이나 내가 좋아하는 작가 케이트 비튼 역시 같은 마음이라는 것에(그리고 이 패러디를 쓴 작가가 다른 비슷한 류의 작품을 두고 출판사로부터 이래서야 창작한 부분이 거의  없지 않느냐는 소리를 들으며 고소당했음에) 작은 위로를 얻을 뿐.  원본은 여기에. 원본의 말 칸 지우기는 언제나처럼 27님이 도와주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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