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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인 오스틴

(1) 출생과 가족

 제인 오스틴의 팬이었고 그에 관한 훌륭한 평론을 남겼던 버지니아 울프는 이미 1920년대에 제인 오스틴 이야기라면 충분히 들었다는 말을 남겼다. 물론 그렇다고 사람들이 멈추진 않았다. 제인 오스틴을 안 좋아하는 사람은 있어도 대충 좋아하는 사람은 없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2016년인 지금 제인 오스틴의 팬들은 더 이상 자료가 없어 고통 받지 않는다. 제인 오스틴이 자전적인 기록을 전혀 남기지 않았고 사후 언니와 조카들이 그의 수많은 편지들 중 대부분을 없애 버렸다는 사실은 변하지 않지만 수많은 전기 작가들과 학자들이 노력해 온 덕에 현대의 독자들은 이제 여러 버젼의 제인 오스틴들을 한 자리에 모아 놓고 서로 맞대결을 시켜볼 수 있을 정도이다. 하지만 여기까지는 영미권 국가 이야기고 우리 나라는 사정이 다르다. 한국에는 제인 오스틴의 수많은 평전들 중 어떤 것도 제대로 넘어오지 못하고 있다. 나 역시 오스틴 매니아의 한 명으로서 여기저기 뒤죽박죽 조각난 정보들만이 떠돌아다니는 것이 안타까워 12월 16일 제인 오스틴의 생일을 기념하는 의미로 정리해보려고 한다. 처음엔 한 번에 정리하려고 했는데 너무 내용이 길어져서 지금부터 12월 16일까지 분야별로 나누어 올릴 예정. 전문적인 연구가 아니라 팬으로서 내가 좋아 정리하는 기록인 만큼 모든 것을 다 담고 있을 수는 없겠지만 그동안 읽었던 여러 권의 책들을 참고하여 적어도 틀린 정보를 전달하는 일은 없도록 노력했다. 


1. 출생과 가족

제인 오스틴은 1775년 12월 16일에 햄프셔 주 스티븐턴에서 태어났다. 그가 태어났을 때는 이미 다섯 명의 오빠들과 한 명의 언니가 있어 부모는 여섯 번째 딸이 마지막 아이이길 기대했지만 몇 년 후 막내 남동생이 태어나 오스틴 가는 8명의 대가족을 꾸리게 된다. 제인 오스틴의 작품은 주로 소규모의 가족, 그 중에서도 몇 명의 주인공에게만 집중하는 형식이고 [오만과 편견]만이 다섯 자매의 삶을 그려 예외적이지만, 정작 본인은 형제들 뿐만 아니라 그의 자손들 그리고 영국에서 인도, 프랑스까지 여러 갈래로 뻗어나간 수많은 사촌들과 또 그들의 많은 자손들과 평생 북적대며 교류하는 삶을 살았다. 


 1) 부모와 친척들

 제인 오스틴의 아버지 조지 오스틴은  옥스퍼드에서 교육 받은 후 부유한 사촌의 도움으로 교구와 경작할 땅을 동시에 얻게 된 목사였고 어머니 카산드라 오스틴의 결혼 전 성은 '리'였다. 방대하게 퍼져 나간 리 가문의 선조는 엘리자베스 여왕 시대의 런던 시장으로 리 가문의 많은 이들이 귀족 작위를 받았거나 귀족들과 결혼했다. 그러나 후손들까지 부유했던 것은 아니라서 카산드라 리의 아버지는 평범한 교구 목사였고 친척으로부터 유산을 물려 받아 부자가 된 오빠와는 달리 카산드라는 작은 유산을 물려받았을 뿐이었다. 어린 시절 카산드라는 시를 써 학자인 삼촌을 놀라게 할 만큼 영민한 꼬마였다는 기록이 있는데 이를 입증하듯 성인이 되어서도 재치 있는 편지와 시들을 쓰곤 했다. 제인 오스틴의 친가인 오스틴 가는 모두 평민이었으나 글을 쓰고 기록하는 것을 중요하게 생각하는 전통이 있었다. 18세기 초반 조지 오스틴의 할머니가 여가 시간에 후손들을 위해 쓴 글이 남아있을 정도. 조지 오스틴에게는 두 명의 자매가 있었는데 한 명은 필라델피아, 한 명은 레오노라였다. 일찍 고아가 된 그들은 무관심한 친척들 손에 맡겨져 힘들게 자랐으나 그래도 남자였던 조지 오스틴에게는 교육을 받을 기회가 주어졌다. 부지런하고 영민했던 그는 장학금을 받고 옥스퍼드로 진학해 중간 계층으로 유입될 준비를 할 수 있었다. 그런 기회가 없었던 여자 형제들의 상황은 더 힘들 수 밖에 없었다. 레오노라는 친척 집에 얹혀 살다가 별 다른 기록을 남기지 못하고 죽었고 필라델피아는 15살의 나이에 런던에서 모자 가게에 견습생으로 들어가야 했다. (이 가게가 당시 출간된 유명한 포르노 소설인 [패니 힐]에 등장하는 성매매 업소의 실제 모델일지 모른다는 의견도 있다.) 오스틴의 친척 중 가장 흥미로운 인물인 필라델피아 오스틴은 견습 기간이 끝나자마자 홀로 남편감을 찾아 동인도 회사와 군대가 많아 젊은 영국 남성들이 많이 살고 있었던 식민지 인도로 떠난다. 이는 상당히 오랜 세월 동안 가족도, 돈도 없어 본토에서 결혼할 가망이 없었던 젊은 영국 여성들이 택하는 방법이었고 온갖 위험을 무릅써야 하는 도박이었으나 필라델피아 오스틴은 비슷한 처지였던 동인도 회사의 직원 워렌 해이스팅스와 결혼해 성공적으로 인도에 자리를 잡는다. 여기서부터 필라델피아의 인생은 더욱 흥미로워지는데, 해이스팅스 부부는 부를 찾아 인도로 온 타이소 핸콕과 친한 친구이자 동업자가 된다. 핸콕의 부인이 죽은 후 인도 내 영국인 사회에는 40대의 남편과 사랑 없는 결혼을 했던 필라델피아가 아직 20대였던 매력적인 핸콕과 깊은 사이가 되었고, 필라델피아가 낳은 딸 일라이자의 친부가 핸콕이라는 소문이 퍼지게 된다. 사실 여부는 알 수 없으나 해이스팅스는 일라이자를 친딸로 받아들여 키웠으며 아편 사업으로 승승장구했던 핸콕은 대부가 되어 큰 유산을 일라지아 앞으로 남겼을 뿐만 아니라 평생 모녀와 가깝게 지냈다. 필라델피아와 조지 오스틴은 서로를 깊이 생각하는 남매였고 멀리 떨어져서도 정기적으로 연락을 주고 받았으며 필라델피아가 일라이자를 데리고 영국으로 돌아왔을 때 그들 모녀는 오스틴 아이들의 출산을 돕기도 했다. 지금 이 글을 읽고 있는 분들은 아무리 오스틴 매니아가 쓰는 글이라고 해도 제인 오스틴의 친가와 외가 친척들에 대해서 이렇게 까지 자세히 알 필요가 있을까 싶겠지만 (참고로 실제 평전들에 비하면 엄청나게 요약한 버전이다.) 알 필요가 있다. 영국의 여러 지역에 흩어져 살고 있었던 친척들은 제인 오스틴과 그의 형제들의 동시대인들로서 그들의 삶을 이해하면 제인 오스틴의 삶도 이해하기 쉽기 때문이다. 대표적으로 필라델피아의 딸인 일라이자는 어머니 못지 않게 흥미로운 삶은 산 인물로 마리 앙투아네트의 궁정에 출입했을 뿐만 아니라 19살의 나이에 32세의 프랑스인 궁정 군인과 결혼하여 프랑스 혁명의 영향을 직접적으로 받았다. 부인의 돈으로 헛된 농지 개간에 매달리다 실패하고 혁명이 일어나자 왕족을 옹호하다 단두대에서 목이 날아간 남편 사이에서 아들 하나를 둔 이 세련된 연상의 사촌은 제인 오스틴에게는 평생 좋은 친구이자 동업자가 되어주었고 그의 오빠들에게는 열정의 대상이 되어 몇 번의 거절 끝에 넷째인 헨리 오스틴과는 부부가 되어 런던에서 화려한 삶을 꾸려나간다.  제인 오스틴은 런던의 오빠 집에서 많은 시간을 보내며 출판업자를 만나 사업을 의논하기도 하고 도시의 유흥을 즐기기도 했다. 그러므로 일라이자의 존재는 제인 오스틴이 도시의 삶이나 프랑스 대혁명 같은 중요한 역사적 사건에 대해서는 전혀 몰랐다는 주장을 반박할 수 있는 직접적인 증거인 것이다. 다른 친척들이 싫든 좋든 제인 오스틴의 삶에 큰 자리를 차지했다면 사촌 일라이자는 혈연이기 이전에 친구였고 이들의 우정은 평생 지속되었다.

 오스틴의 부모의 이야기로 돌아가자면, 두 사람은 적은 수입으로 대가족을 꾸려 나가느라 그야말로 쉴 새 없이 일했다. 조지 오스틴은 교구 목사일 뿐만 아니라 영지를 갖고 있는 농부이며 남자 아이들을 위한 기숙 학교 선생님이기도 했다. 카산드라 오스틴 역시 자신의 여러 아이들 뿐만 아니라 집을 떠나 온 조지 오스틴의 학생들을 먹이고 돌보는 동시에 농작물을 관리하고 가축을 돌보는 등 여러 역할을 맡고 있었다. 카산드라 오스틴은 활발하고 재치 있는 성격 덕분에 학생들에게 매우 인기가 높았다고 전해지며 한 학생이 돌아오지 않자 말장난과 라임에 능했던 그는 재미있는 시를 써서 오스틴 학교로 돌아오기를 권하기도 했다. 이 학생은 실제로 곧 돌아와 옥스퍼드에 진학했으며 이때 받은 시를 소중하게 간직했다. 이렇듯 밝고 가족적인 분위기의 학교에서 즐거운 유년기를 보낸 학생들 중 상당수는 오스틴 아이들에게는 또 다른 형제와 같은 사이가 되었다. 제인 오스틴이 어릴 때 쓴 이야기들은 남자 아이들이 넘쳐나는 집의 활기찬 에너지를 반영하듯이 폭력과 거친 몸 싸움, 험한 말 장난 등으로 가득해 얌전한 목사관의 소녀가 수줍게 숨겨가며 썼다는 이미지와는 전혀 맞지 않는다. 이 이야기들은 명백하게 소년 관객들을 의식하고 쓴 농담들이다. 제인 오스틴은 부드러운 성격에 책을 좋아했던 아버지와 더 가까웠던 것으로 보인다. 그는 십대 시절 목사였던 아버지 조지 오스틴이 관리했던 교회에 몰래 들어가 결혼 명부에 자신의 이름과 가상의 신랑 이름을 적어 놓거나 가족끼리 돌려보기 위해 썼던 풍자적인 역사서에 가톨릭에 끌린다고 써 놓는 등 아버지를 겨냥한 장난을 종종 쳤는데, 이것만 봐도 아버지와 편한 사이였음을 알 수 있다. 조지 오스틴은 19살이 된 제인 오스틴의 생일 선물로 글 쓰기 용 책상을 선물하고 딸의 작품을 출판하려고 가장 먼저 시도했을 정도로 딸의 재능을 믿고 지지했다. 어머니 카산드라와는 좀 더 복잡해 제인 오스틴은 어머니의 실용적인 성격과 의지를 높게 평가했고 풍자에 대한 재능까지 물려 받았지만 남아있는 편지들로 봐서는 늘 쉬운 관계는 아니었던 것 같다. 평생 열심히 일 했고 많은 아이를 낳은 탓에 만성적인 질환들에 시달려 다소 건강 염려증이 있었던 카산드라 오스틴은 때로 둘째 딸의 인내심을 바닥나게 하기도 했지만 많은 손자 손녀들을 두고 장수하다가 80대에 죽었다.


2) 형제들

오스틴 부부에게는 독특한 양육 철학이 있었는데 그것은 아기가 태어나면 몇 개월간은 카산드라가 직접 모유 수유를 한 다음에 1년 정도 한 동네의 다른 가정에 맡겼다가 되찾아 오는 것이었다. 아직 부모와 아이간의 초기 애착 형성의 중요함 등과 같은 정교한 육아 이론이 발달하지 않았던 때인 만큼 오스틴 부부는 아무런 거리낌 없이 여섯 아이를 모두 이런 방식으로 길렀는데 실제로 효과가 있었는지 유아 사망률이 매우 높던 시기에 오스틴 아이들은 대부분 성인으로 건강하게 자랐고 서로 간의 애착도 깊었다. 유일한 예외는 둘째 아들인 조지였는데 그의 경우에는 선천적인 문제가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첫째인 제임스는 막내인 찰스가 태어났을 때는 이미 14살로 아버지의 모교였던 옥스퍼드의 세인트 칼리지에서 공부를 시작했다. 아버지처럼 독서를 좋아하고 학문에 재능이 있었던 그는 세인트 칼리지의 창립자의 후손이었기에 (외가인 리 가문 쪽으로 연결되어 있었다.) 학비를 내지 않고 공부할 수 있었다. 그는 일찌감치 시를 쓰기 시작했고 동생인 헨리와 함께 문예 잡지를 발간하기도 했으며, 아마추어 연극에도 흥미가 있어 동생들과 친구들 그리고 친한 이웃들을 모아 공연을 했던 세련되고 영향력 강한 오빠였다. 문예 잡지의 빠른 폐간 이후 전문 작가로의 꿈을 접고 목사가 된 그는 아버지로부터 스티븐턴 교구를 물려받았는데 갑작스럽게 바스로 삶의 터전을 옮기기로 한 부모의 결정에 심한 충격을 받은 제인 오스틴은 후임자인 제임스와 그의 부인이 지나치게 기뻐할 뿐만 아니라 경매에 붙여진 가족의 물건들을 제대로 된 값을 내고 사서 보관해주지 않는 것을 두고 불평하기도 했다. 제인 오스틴은 제임스의 두 번째 부인인 메리를 싫어했으며(이는 양방향적 감정이었다) 첫째 오빠에게서 시인이자 문학가로서의 면모가 점차 사라짐을 안타깝게 여겼다. 그가 첫 번째 결혼에서 얻은 딸 애나는 제인 오스틴과 가까운 조카들 중 한 명이었다. 우리가 현재 알고 있는 많은 제인 오스틴에 대한 정보는 애나의 기록과 회상에서 나온 것이다. 두 번째 결혼에서 얻은 아들 제임스 에드워드 리는 제인 오스틴의 전기를 썼다.


둘째인 조지 오스틴의 이야기는 좀 더 가슴 아프다. 현대의 기준으로 정확한 병명은 알 수 없지만 어릴 때부터 종종 간질 발작을 일으키고 제대로 발달하지 못했다는 기록이 남아 있고 제인 오스틴이 수화를 할 줄 알았다는 사실로 미루어보아 조지 오스틴은 말을 못 했거나 귀가 들리지 않았으리라 짐작된다. 그는 환자들을 잔인하게 대했던 당시의 정신병원에 갇히는 대신 대신 어릴 때 비슷한 증상을 가지고 있었던 외삼촌 토마스 리가 보살핌을 받으며 살고 있었던 조용한 시골 마을로 보내졌고 거기서 평생을 살았다. 조지 오스틴을 보살피는데 들어가는 비용은 처음에는 부모가, 후에는 형제들이 분담했다. (영화 [비커밍 제인]에는 조지가 성인이 될 때까지도 형제들과 스티븐턴에 함께 살았다고 묘사되는데 이는 사실이 아니며, 이 영화에는 이 외에도 정확하지 않은 부분들이 많은데 뒤에서 좀 더 다루겠다.)

셋째인  에드워드는 행운아였다. 아버지인 조지 오스틴이 교구와 농지 모두를 가질 수 있도록 도와주었던 부유한 사촌 토마스 나이트는 결혼 후 부인과 스티븐턴을 방문 했는데 12살이었던 온순한 소년 에드워드를 너무나 마음에 들어해 신혼 여행에 데려갔다고 한다. 그 후로도 자주 이 부유한 친척의 거대한 영지에 자주 초대되었던 에드워드는 16세에 아이가 없었던 나이트 부부에게 정식으로 입양되었다. 이런 가족 내 입양은 당시 영국에서 흔한 일이었고 오스틴들 역시 모두 에드워드의 운에 기뻐했다고 전해진다. 토마스 나이트가 죽은 후 많은 재산과 거대한 영지를 물려받은 에드워드는 엄청난 부를 소유하게 되었으며 아버지의 갑작스러운 죽음 이후 집 없이 떠돌던 어머니와 카산드라와 제인에게 남은 일생을 보낼 수 있는 집을 제공했다. 죽기 얼마 전을 제외하고는 이 집에서 남은 일생을 보낸 제인 오스틴은 이곳에서 가장 왕성한 작품 활동을 하면서 20대에 쓴 초고들을 수정하여 지금 우리가 알고 있는 작품들로 다듬어내기도 했다. 에드워드의 11명의 아이 중 맏이인 패니는 제인 오스틴이 가장 좋아했던 조카로 어린 여동생에 가깝다고 느낄 정도로 친밀한 사이었다. 패니 역시 고모 제인 오스틴으로부터 훌륭한 충고와 애정으로 가득한 편지들을 많이 받았으며 제인 오스틴 살아 생전의 모습을 가장 잘 알고 있었던 사람 중 하나였다. 그녀의 회상과 기록 역시 제인 오스틴 연구에서 자주 인용되는 자료이다.


넷째인 헨리는 제인 오스틴이 가장 좋아했던 오빠이자 그의 작가 인생에 가장 큰 영향을 미친 형제이기도 하다. 오스틴들 중 가장 매력적이고 낙천적이며 다방면에 재능이 있었으나 가장 불안정한 삶을 살기도 한 그는 형인 제임스와는 달리 교구를 물려받을 가망도 없었고 유산도 없었기에 옥스퍼드 세인트 칼리지를 졸업한 후 목사가 아닌 군인으로서 커리어를 시작했다. 민병대 장교로 근무하는 동안 그는 군에 잘 적응했으나 그 당시 선택권이 별로 없었던 많은 젊은이들처럼 군인으로서의 삶보다는 춤과 군부대가 주둔한 마을의 아가씨들과 연애를 하는 것에 더 흥미가 있었던 것 같다. 이 당시 헨리 오스틴과 같은 본토 주둔 민병대 군인들의 삶은 제인 오스틴의 [오만과 편견]에 잘 묘사되어 있으며 목사로의 길을 버리고 군인의 삶을 택한 매력적인 바람둥이 위컴의 모델을 헨리 오스틴으로 보는 의견도 있다. 매혹적인 사촌 일라이자를 두고 형인 제임스와 경쟁을 벌이기도 했던 헨리는 결국 일라이자와 결혼 했고 군인들을 대상으로 한 은행을 개업해 빠르게 사업을 확장시키면서 런던에서의 화려한 삶을 즐겼으나 오래가지 못해 파업하고 말았다. 그는 그 후 결국 아버지와 형처럼 목사가 되었는데 아버지와는 달리 복음주의 노선을 걷게 된다. 헨리 오스틴과 그의 아내이자 사촌인 일라이자는 평생 제인 오스틴의 매우 가까운 친구였을 뿐만 아니라 작가로서의 그의 재능과 야심을 가장 잘 이해한 사람들이기도 했다. 특히 헨리는 작가인 여동생의 대리인으로서 출판업자들과 흥정하고 계약을 맺는 등 많은 일을 했다. 또한 그는 여동생이 죽은 후 카산드라와 의논해 [노생거 애비]와 [설득]을 출판했는데 이때 그가 붙인 짧은 서문이 제인 오스틴에 대한 최초의 전기라고 볼 수 있다. 복음주의 노선을 걷게 된 목사가 된 후 헨리가 쓴 이 글은 독신으로 죽은 여동생의 독실함과 겸손함을 강조하고 있는 애정 어린 기록이지만 그의 조카인 제임스 에드워드 리의 전기와 더불어 전문 작가였던 제인 오스틴을 자신과 가족의 즐거움만을 위해 글을 쓴 아마추어로 비춰지게 하는 역할을 하기도 했다. 순종적인 여성상에 집착했던 빅토리아 시대를 지나면서 더욱 강화되었던 이런 이미지는 후대의 수많은 제인 오스틴 학자들에 의해 상당 부분 반박 되었다.


다섯째인 카산드라와 제인 오스틴의 관계에 대해 이야기하자면 따로 책 한 권을 써도 부족할 것이다. 이들은 어머니인 카산드라 오스틴이 "카산드라가 목이 잘릴 처지가 된다면 제인도 따라 목이 잘리고자 할 것"이라고 말했을 정도로 어릴 적부터 매우 친밀한 사이었으며 제인 오스틴은 언니와 떨어지기 싫어 다소 어린 나이에 집을 떠나 옥스퍼드의 여학교로 옮겨갔다고 전해다. 이 학교에서 전염병에 걸려 죽음의 문턱까지 갔던 두 사람은 다른 여학교로 옮겨 학업을 마쳤으며 그 짧은 교육이 자매의 유일한 공식적인 교육이었다. 수많은 조카들과 친척들, 그리고 친구들을 방문하기 위한 잦은 여행으로 서로 떨어져 있는 기간이 적지 않았으나 두 사람은 같은 집에 살 때면 늘 한 방을 썼다. 함께 있지 않을 때면 자매는 거의 매일 편지를 주고 받았으며 제인 오스틴은 언니인 카산드라에게 짓궂은 농담부터 집필 중인 작품들에 대한 이야기까지 모든 것을 믿고 털어놓을 수 있었다. 카산드라는 20대에 먼 친척이자 아버지인 조지 오스틴의 학생이기도 했던 톰 파울과 약혼을 했으나 결혼 후 카산드라와 정착하기 위해서는 돈이 필요했던 그는 배를 탔다가 병에 걸려 죽었다. 카산드라가 톰 파울과 약혼했던 시기는 제인 오스틴이 가장 활발하게 남편감을 물색했던 시기이기도 한데, 언니 없이 집에 혼자 남고 싶지 않았던 마음이 컸던 것으로 보인다. 어릴 때부터 잘 알고 지냈으며 오스틴 가족으로부터 두루 사랑 받았던 젊은 약혼자의 때 이른 죽음 이후 두 사람은 더 가까워졌으며 제인 오스틴이 41세의 나이로 카산드라의 품에서 세상을 뜬 후 그는 동생의 유언 집행인이자 작품 판권의 소유자가 되었다. 카산드라 오스틴은 동생의 유언을 충실하게 이행했고 지나치게 사적인 내용이 담겨 있다고 판단해 평생 두 사람이 주고받은 방대한 양의 편지들의 대부분을 없애버렸으나 살아남은 편지들과 작품들, 원고들은 매우 좋은 상태로 잘 보관되었다. 이 자료들은 제인 오스틴이 아꼈던 조카들과 동생들이 물려 받았다.    


여섯째인 프랜시스 오스틴은 제인 오스틴과 나이 상으로 가장 가까운 오빠로 어린 나이에 해군에 입대해 나폴레옹과 싸웠다. 그는 다른 오스틴들과 마찬가지로 아무것도 주어진 것이 없는 처지에 좌절하지 않고 자신의 길을 개척한 성실한 사람이었다. 프랜시스의 첫 아들이 태어난 후 제인 오스틴은 육아실에서 함께 자던 어린아이 시절부터도 늘 용감하고 반항적이었던 오빠를 추억하며 태어난 조카 역시 그런 성격을 닮기를 바란다는 사랑스러운 축하 시를 보내기도 했다. 프랜시스는 오스틴들 중 가장 유머 감각이 없다는 평을 받았지만 (그의 해군 시절 일화에는 우리 나라의 돌 굴러가유~랑 비슷한 이야기가 있다. 그의 상관이 바다에서 수영을 하는 동안 상어가 나타나자 프랜시스가 경고했지만 너무나 침착한 그의 태도에 농담이라고 생각했던 상관이 믿지 않자 그는 저는 농담을 할 줄 모릅니다, 라고 답했다고 한다.) 그는 몇십 년이 지난 후에도 여동생이 [맨스필드 파크]에 넣어두었던 해군 내 동성애에 관한 짓궂은 농담을 생생하게 기억하고 있었다고 한다. 성실한 성격 답게 프랜시스 오스틴은 아버지가 갑작스럽게 죽은 후 어머니와 자매들을 늘 도우려고 애썼고 가장 부유했던 에드워드가 고정적인 주거 장소를 마련해주기 전까지 제인 오스틴이 싫어했던 바스에서 벗어나 자신의 부인과 함께 살 수 있도록 집을 마련해주기도 했다. 제인과 카산드라는 프랜시스의 부인 메리 깁슨을 매우 좋아했으며 함께 살았던 집도 좋아했으나 안타깝게도 메리는 열 명의 아이를 낳은 후 열 한 번째 출산에서 죽고 말았다. 말년에 프랜시스는 자매들의 절친한 친구였던 마사 로이드와 다시 결혼을 한다.


막내인 찰스 오스틴은 형인 프랜시스처럼 어린 나이에 해군에 입대해 영국 해군이 가장 활발하게 활동했던 시기를 정통으로 관통하는 삶을 살았다. 유일한 동생이었던 찰스에게 늘 애정을 갖고 그의 삶에 관심을 가졌던 제인 오스틴은 [맨스필드 파크]와 [설득]에서 항구 도시 포츠머스와 물려 받은 재산 없이 자신의 능력으로 스스로의 길을 개척해나가는 해군들의 삶을 소재로 사용하기도 했다. [맨스필드 파크]의 가장 매력적인 인물인 윌리엄 프라이스(주인공 패니 프라이스의 해군 오빠)는 프란시스와 찰리를 섞은 인물로 보이는데, 윌리엄이 변변한 장신구 하나 없는 여동생 패니를 위해 목걸이용 호박석 십자가를 선물한 것처럼 찰스는 누나들에게 토파즈 십자가와 금줄을 선물했다. 이 선물을 받고 제인 오스틴이 카산드라에게 쓴 편지에는 굳이 돈을 써서 이런 선물을 사오다니 혼을 내야겠다고 농담을 하면서도 자주 만날 수 없는 막내 동생의 애정 어린 선물에 감동한 누나로서의 심정이 그대로 묻어 난다. 제인 오스틴의 사후 프란시스 오스틴은 그가 [설득]의 주인공 프레데릭 웬트워스의 모델이 아니냐는 질문을 받자 자신은 다른 인물에게 영감을 준 것 같고(웬트워스의 친구인 하빌 대령) 동생인 찰스가 웬트워스에 가깝다고 생각한다는 답을 한 적이 있다. 찰스 오스틴은 성실함 성품과 해군으로서의 긴 경력에도 불구하고 운이 따르지 않아 여유롭지 못한 삶을 살다가 바다에서 생을 마감했다. 


오스틴들은 읽고 쓰고 놀고 연극하는 것을 즐기는 활발하고 영리하며 서로를 깊이 좋아하는 흥미로운 가족이었다. 그러나 한 번도 부유하진 않았지만 좋은 이웃이자 도움이 되는 친척들이었던 이들을 특별히 진보적인 인물들이라고 보기는 힘들 것이다. 아버지 조지 오스틴은 독서를 즐기는 지적인 목사였지만 동시에 농부였고 아들들인 헨리와 제임스는 시골에서의 사냥과 춤을 즐기고 토리를 지지하는 전형적인 젠트리 계급에서의 삶에서 벗어날 생각이 전혀 없었다. 프랜시스와 찰스 역시 바다에서 돈을 벌어 안락한 집을 사고 가족을 꾸리는 것이 삶의 목표였다. 그들 중 누구도 사회 구조 밖으로 나가지 않았으며 개혁가도 없었다. 그러므로 특별히 두각을 드러내는 일 없이 흔히 '영국의 등뼈'라고 표현되는 중간 계급으로서 성실하게 살다가 잊혀졌을 오스틴들이 이렇게 생생한 모습으로 남게 된 것은 오로지 그들 사이에 제인 오스틴이라는 빼어난 작가가 있었기 때문이다. 무명으로 살았고 무명으로 죽었던 여자 형제 덕분에 '오스틴'이 불멸의 이름으로 역사에 새겨지게 될 미래를 볼 수 있었다면 그들은 뭐라고 했을까? 적어도 카산드라는 미리 알았던 것 같다. 그녀는 사랑하는 여동생이 죽은 후 [설득]의 한 페이지 여백에 이렇게 썼다고 한다. "사랑하고 사랑하는 제인! 이 말들은 금으로 쓰여질 자격이 있구나!" 


다음 이야기에서는 제인 오스틴의 친구들과 이웃들에 대해서 다루고자 한다. 그들 역시 가족 못지 않게 제인 오스틴에게는 중요한 존재들이었다. 


#제인오스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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