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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간은 말할 것도 없고

절판이 왠 말이오

   <Black out>과 <All clear>를 마지막으로 코니 윌리스 여사의 네트는 당분간 닫힌 것 같다, 어쩌구 하면서 장문의 글을 썼던 게 벌써 2년 전이다. 그것만 해도 약간 믿기 어려운데  더 믿을수가 없는 것은 아직도 번역본이 없다는 사실. 심지어는 코니 윌리스의 전작들마저 절판이다. 늦어도 1년 안에는 신작의 하드 커버 번역판이 나올 줄 알았는데 무심한 세월만 흐르고 나만 그냥 늙었다. 왠지 억울하다.

 무려 8년간의 자료 수집과 집필 끝에 드디어 세상의 빛을 본 <Black out>과 <All clear>는 옥스퍼드 시간 여행 유니버스를 완성하는 마지막 퍼즐 조각인 동시에 완성된 퍼즐판이다. 그동안 만나보았던 역사학도들과 던워디 교수가 함께 총 출동하는 올스타전이기도 하다. 코니 윌리스의 팬이라면 누구나 알겠지만 그녀의 옥스퍼드 시간 여행 시리즈는 읽을 수 있는 순서가 두 개다. 두 개 라고 해도 그냥 팬들이나 챙겨보면서 소소하게 기뻐할 디테일이었고, <개는 말할 것도 없고>까지만 해도  어떻게 읽든 별 상관이 없었는데  <Black out>과 <All clear>가 나오면서 사정이 조금 달라졌다. 예전 블로그에서 이 순서에 관한 얘기를 한 적이 있었는데 여기에도 옮겨둔다. 신작 번역 소식은 없어도 절판되었던 작품들은 조만간 다시 나올 예정이라고 하니 기념삼아. 

  • 쓰여진 시기 : <화재 감시원>(1982) - <둠즈데이 북> (1992) - <개는 말할 것도 없고> (1998) - <Black out>,<All clear>(2010)
  • 책 속의 사건들이 일어난 시기 : <둠즈데이 북> 키브린의 중세로의 시간여행 - <화재 감시원> 키브린의 룸메이트인 존 바솔로뮤의 2차 세계대전 대공습 당시 런던으로의 시간여행 - <개는 말할 것도 없고>의 네드와 베리티,(핀치)의 빅토리아 시대로의 시간 여행 - <Black out>/<All clear>의 마이클, 폴리, 에일린의 2차 세계대전 당시 영국으로의 시간여행

  윌리스 여사가 속편을 거듭하다가 시들어버리는 시리즈물을 싫어한다. 그렇기에 <개는 말할 것도 없고>까지는 어떻게 읽든 순서는 그닥 중요하지 않았다. 세 작품들 사이에 느슨한 연결고리만이 존재했기 때문. 시간 여행 이론은 물론 작품을 거듭하면서 확장되고 진화되지만 결국 한 번은 주인공들이 친절하게 다 설명을 하기 때문에 전작을 뛰어 넘었다고 후편을 못 읽을 이유도 없었고. 그러나 완결판인 <Black out>과 <All clear>에 오면 옥스퍼드 시간 여행 유니버스로서는 최초로 많은 시간 여행자들이 "2차 세계 대전 당시의 영국"이라는 시공간에 동시에 존재하게 된다. 이제부터는 이 시공간대에서 일어난 모든 사건은 서로의 프리퀄인 동시에 후속편인 셈. 서로가 서로의 미래와 과거에 영향을 미치는지조차 확신할 수 없는 주인공 역사학자들은 그 어느 때보다도 복잡한 곤경에 처하게 되고, 급한 대로 현재 자신들과 시공간대를 공유하는 과거의 시간 여행들을 하나씩 되짚어 나가게 된다. 이러니 아무래도 전작들을 잘 알수록 주인공들과 함께 퍼즐을 풀어나가는 느낌이 강해질 수 밖에 없다. 물론 다른 시간 여행 이야기들과 마찬가지로 이번 이야기들도 충분히 혼자서도 기능하는 유니버스이고, 숨겨진 단서들만 잘 봐도 풀리는 퍼즐로서의 재미도 있지만 이건 그런 거다.  <반지의 제왕> 안 봐도 <호빗>은 충분히 재밌지만 (그러니까 1편은) 프로도가 간달프 마중하러 뛰어나가는 장면에서는 아무래도 <반지의 제왕>을 본 사람이 더 감동받을 수 밖에 없는 것. 그러니 이 글에서는 앞선 작품들도 간단하게  끓는 점, 연결점들을 짚어본 후에 <Black out>과 <All clear>가 왜 하루 빨리 번역본이 나와야 되는지 열변을 토해보려고 한다. 

1. <화재 감시원> 

 St. Paul이 아니라 St.Paul's - 존경하는 던워디 교수님 - 고양이는 말할 것도 없고 - 나는 공산당이 싫어요 - 넬슨 제독의 베개 - 히틀러와 기말고사

옥스퍼드 시간 여행이라는 거대한 유니버스의 뼈대를 세운 매력적인 단편. 부족한 시간과 잠과 정보로 인한 혼란, 선한 의도가 불러오는 오해, 위기 속에서 영웅이 되는 선량한 보통 사람들, 한 번에 제대로 말해주는 법이 없는 던워디 교수와 애는 착하지만 말은 더럽게 안 듣는 인류애 넘치는 제자들, 세인트 폴 대성당 등등 앞으로도 꾸준히 반복될 테마들의 탄생을 볼 수 있는 프리뷰 같은 작품인 동시에 혼자서도 충분히 기능하는 멋진 이야기다. 후기의 작품들보다 덜 다듬어진 거친 맛이 있기도.

 주인공인 존 바솔로뮤는 윌리스 여사가 나치의 공습으로 인해 불타는 런던 한 가운데에 "실수로" 떨어뜨린 최초의 인물답게 후에 등장할 다른 어떤 미래로부터 온 역사학도들보다도 혈기 왕성하다. 이때만 해도 과거의 사건에 영향을 주어서는 안 되며 중립적인 관찰자로 남아있어야 한다는 기본적인 규칙 정도는 확립되어 있지만 인과 모순이라든가 편차라든가 시공간의 완전한 붕괴로 인한 네트 고장 같은 무시무시한 개념은 제대로 도입되기 전이다. 그래서인지 바솔로뮤는 후배들은 후에 밤잠을 설쳐가며 몇 달씩 고민하게 될 실수들을 마구잡이로 저지르면서도 인과 모순에 대해 걱정하기는커녕 이게 역사학자라면 이 놈의 옥스퍼드 내가 먼저 때려치우겠다며 지도 교수에게 땡깡까지 부리는 패기를 보여준다. 역사학자라면 부딪힐 수 밖에 없는 한계와 제약에 가장 먼저 눈을 뜨고 반항하다가 인생을 바꿔놓을 교훈을 깨닫는, 마치 윌리스 여사의 아담 같은 인물. 바솔로뮤는 오랫동안 내가 가장 좋아했던 역사학도로 장편들에 이름만 나와도 귀가 쫑긋쫑긋 했었는데 스포일러라 자세히 말할 수는 없지만 기억해야 할 이름이 된 건 확실하다. 존 바솔로뮤를 잊지 마시라.

끓는 점 : 그가 미소를 지었다. "생각해보면 나쁜 계획은 아니지. 물론 우리는 그런 일이 일어나게 내버려 두진 않을 거지만. 그게 화재 감시원이 여기 있는 이유잖아. 그런 일이 일어나는 걸 막으려는 거지. 안 그래, 바솔로뮤?"  내 실습의 목적을 이제는 안다. 나는 랭비가 세인트 폴 대성당을 불태워버리는 것을 막아야 하는 것이다. 

2. <둠즈데이 북>

 징글벨 - 모든 시대는 10 - 그것은 쥐였습니다 - 백설공주와 궁정 로맨스 - 묵시적인 곱스토퍼 - 성녀와 아스프린 - 십자군 원정대

  <둠즈데이 북>은 시간 여행 유니버스에서는 최초의 장편으로, 오랫동안 작품성도 가장 높다고 평가 받았던 작품이다. 시간 편차, 인과 모순, 네트의 오작동 등의 중요한 개념들이 처음으로 소개되긴 하지만 시간 여행의 기술적인 면보다는 극한 상황 속에서 나타나는 보통 사람들의 영웅적인 모습에 더욱 초점을 맞추는 것이 특징. 후의 작품들이 역사학자들이 과거로 돌아간 상태에서 겪는 어려움에 좀 더 집중한다면 이 작품은 과거와 미래를 나란히 전개하는 독특한 설정을 보여주는데, 무시무시할 정도로 효과적이다. 흑사병이 도는 중세라는 암울한 설정에도 불구하고, 앞서 말했듯이 시간 여행의 기술적인 면이 가장 중요하지 않는 작품이기 때문에 가장 읽기 쉬웠다는 평도 의외로 많다. 쓰는 시간보다 조사하는 시간이 열 배쯤 더 걸릴 듯한 조사광 윌리스의 철저한 중세 시대 재현 덕분에 SF 팬들뿐만 아니라 대체 역사물이나 역사에 관심이 많은 독자층에게도 인기가 높은 작품.

 <둠즈데이 북>은 시간 여행 유니버스에서 가장 독립적으로 움직이는 것 같지만 전작에서는 미스테리하기만 하던 던워디 교수가 어떤 사람인지를 자세히 보여줄뿐만 아니라 미래에 아주 중요한 역할을 하게 될 인물의 등장이라는 점에서 다음 작품인 <개는 말할 것도 없고> 못지않게  <Black out>과 <All clear>와 강한 연결고리를 갖고 있다. 옥스퍼드 시간 여행 유니버스의 슈퍼 스타가 탄생한 책이기도. 구글링을 해보면 뒷 작품들부터 읽은 독자들이 ㅁㅁ가 대체 누구죠? 라고 올려놓은 질문들이 꽤 있던데, 절대 스포일러를 당하면 안 되는 부분이니 조심 또 조심하시길. 

끓는 점 : 하지만 마냥 동화 속 이야기 같지는 않을 것이라 하셨던 점에 대해서는 교수님이 틀리셨어요. 어디를 둘러봐도 동화에서 막 튀어나온 것들로 가득해요. 아그네스의 빨간 망토와 후드, 쥐 우리, 포리지 그릿, 그리고 지푸라기와 나뭇가지로 만든 오두막들이 가득한 마을까지요. 이렇게 허술한 오두막이라면 늑대가 전혀 힘들이지 않고 날려 버릴 수 있을 것 같아요. 종탑은 라푼젤이 갇혀 있었을 법한 모양이고요. 고개를 숙이고 수놓는 일에 열중하고 있는 로즈먼드는 칠흑같이 검은 머릿결에 하얀 모자, 사과같이 붉은 뺨까지, 백설 공주를 그대로 가져다 놓은 듯하네요.

3. <개는 말할 것도 없고>

신은 사소한 일도 지켜보고 계신다 - 꿈에서나 볼 수 있는 첨탑이 가득한 아름다운 도시 - 슈뢰딩거의 아주먼드 공주 - 범인은 언제나 집사

 <개는 말할 것도 없고>에서 시간 여행 이론은 껑충 진화하여 거의 완성된 모습을 갖추게 된다. 어쨌든 폭격을 당해 죽거나 질병이나 강도, 살인범 때문에 죽을 가능성은 거의 없어 보이는 평온한 빅토리아 시대를 배경으로 하고 있고, 시종일관 밝고 명랑하며 몸개그를 권장하는 분위기인지라 주인공 걱정은 하지 않아도 된다. 대신 그 시간에 머리를 쥐어짜며 미래의 옥스퍼드 신입생이 기말고사 준비하듯이 편차니 인과 모순이니 시공간 붕괴니 하는 온갖 복잡한 시간 여행 이론을 열심히 공부해야 하는 괴로움이 있다. 이 책은 앞부분을 살짝 스포일러를 한다고 해도 그다지 문제가 될 것 같지 않으므로 (그래도 신경이 쓰이는 분은 마지막 문단으로 건너 뛰시길.) 간단하게나마 정리를 해보자면 주인공인 네드와 베리티가 활약하는 2057년의 옥스퍼드는 시간 이론에 대한 나름의 가설을 확고하게 세워놓았다. 오로지 '이론적으로만' 따져 보았을때, 역사학자들은 과거로 끼어들어 인과 모순을 일으킴으로써 이미 일어난 역사의 진행방향을 바꾸어놓을 수가 있다. 그러나 실제의 시공간은 아주 정교한 방어 장치를 갖춘 체계로서 1.역사학자들이 도달하고자 하는 시공간대에 예상치 못한 변수(목격자 등)가 있어 역사학자들이 인과모순을 일으킬 수 있는 경우에는 시공간대를 재설정하는 '편차'를 주며 2. 그래도 역사학자가 심한 인과 모순을 일으킬 때에는 아예 네트를 막아버려 과거에 역사학자들을 가둬두고 3. 아주 사소한 영향조차 결과를 뒤바꾸어놓을 수 있는 중요한 '분기점'인 경우에는 역시나 아예 네트를 여는 것조차 불가능하게 하여 역사학자들이 가지 못하도록 하며 4. 인과모순이 일어나는 경우 나름의 교정작업을 하므로 시간 여행은 대체로 상당히 안전하다는 것이 그 요지. (물론 '안전'하다는 것은 시공간에게 그렇다는 뜻이다. 그 속의 시간 여행자들에게가 아니라.)

네드와 베리티는 위의 이론에 입각하여, 과거에서 여러가지 인과 모순을 일으켰음에도 불구하고 눈에 띄는 편차도 나타나지 않고 교정도 이루어지지 않자 끝없는 불안함에 시달린다. 아무리 이론적으로 불가능하다고는 해도 우리가 저지른 인과모순이 시공간의 방어력을 뛰어넘어 정말로 역사의 진행 경로를 바꾸어 놓았으면 어쩌지!? 내내 이런 식. 그리고 바로 이것이 <개는 말할 것도>가 <Black out>,<All clear>과 공유하는 중요한 질문이다. 미래에서 과거로 온 역사학자들은 정말로 역사의 진행 경로에 영향을 줄 수 있는가? 그리고 시공간은 그것을 허용하는가? 

 윌리스 여사의 시간 여행 이야기들 중에서는 가장 하드 SF적인 설정이지만 처음부터 완전히 이해하려고 하지 않고 읽어도 충분히 재밌다. 빅토리아 시대라는 평화로우면서도 우스꽝스러운 시대를 바탕으로 벌어지는 온갖 소동에, 뒷 작품들에도 이어질 아가사 크리스티 등을 비롯한 추리소설들에 대한 오마쥬에, 제롬 케이 제롬의 <개는 말할 것도 없고> 패러디 등등, 깨알 같은 포인트가 너무 많다. <둠즈데이 북>에서 이미 보여준 재현 실력이 <개는 말할 것도 없고>에서도 유감없이 발휘되는데 빅토리아 시대는 워낙 소재가 넘쳐나는만큼 흥겹다. 복잡하긴 하지만 계속 읽다보면 결국 플롯도 이해가 된다. 까먹을 만 하면 주인공인 네드와 베리티가 만담하듯 열심히 풀어주기도 하고. 시간 여행자들이 과거로 돌아가서 만난 인물들 중 가장 매력 있는 사람 및 동물인 테렌스와 시릴도 너무 귀엽다.

끓는 점 : 나는 길을 건너기 위해 이곳에 수백 번도 넘게 서 있어 봤지만, 그때는 관광객용 쇼핑 센터와 지하철역이 있는 21세기의 옥스퍼드였다. 이곳이, 이곳이 바로 <태양 빛이 내리쬐는> 진짜 옥스퍼드, 뉴면과 루이스 캐럴과 톰 브라운이 있는 옥스퍼드였다. 하이 스트리트를 돌아서면 퀸스 칼리지와 막달렌 칼리지, 그리고 높다란 창과 체인 북이 가득한 구 보들리 도서관이 있었고, 그 옆에는 래드클리프 카메라 건물과 셸도니안 극장이 있었다. 그리고 브로드 스트리트 모퉁이를 돌면 베일리얼 칼리지가 영광스런 자태를 뽐내고 있었다. 매슈 아놀드, 제라드 맨리 홉킨스, 애스퀴스의 베일리얼이. 그리고 베일리얼에는 위엄 있는 목소리로 학생에게 <설명 말게. 변명도 말고>라고 말하던 텁수룩한 백발의, 저 위대한 자우잇이 있었다

4. <Black out>, <All clear>

 History is now and England -  집에 가기 싫어요 - 네트 잃고 대성당 고치기 - 크리스마스의 유령 - Stay calm and carry on

  1939년부터 1945년까지 2차 세계대전 당시의 영국이 무대가 되는 윌리스 여사의 마지막 두 소설은 상편 하편의 개념이 아닌 서로를 보완하는 하나의 책이라고 봐야 한다. 몇 개월동안 한 역사학도가 한 지역만을 둘러보고 제임스 던워디 교수는 오로지 한 학기에 한 지도학생만을 받는 듯하던 개인 교수식 설정은 <개는 말할 것도 없고>에서 이미 깨어졌는데, <Black out>과 <All clear>는 완결판답게 그 규모부터가 야심차다. 글의 시작 부분에서 최소 5명의 학생들이 2차 세계 대전을 주제로 실습을 준비 중이고 이미 런던에서는 과거에서 온 옥스퍼드의 다른 역사학자 선배들이 한창 실습중이다. 게다가 스포일러라 말 할 수 없는 깜짝 손님들에, 주인공인 에일린, 마이클, 폴리과 인연을 맺게 되는 중요한 비중의 과거의 사람들까지 등장하고 나면 정말 사람들로 버글거리는 느낌이다. 거기다 편리하게도 전시 상황 + 시간 여행이라는 설정이 합쳐져 온갖 가명에 별명까지 쏟아져나오면서 정신이 없지만 윌리스 여사님의 작품이 언제나 그러하듯 믿고 따르다 보면 어느 순간 개안하게 된다. 너무 헷갈린다면 메모장을 들고 등장 인물을 모조리 적어가며 읽는 것도 괜찮은 방법.

 <Black out>과 <All clear> 역시 다른 작품들처럼 독립적으로도 충분히 재밌는 이야기들이긴 하지만 윌리스 여사가 자신의 전작들을 다시 한 번 꼼꼼이 되돌아보고 종합 및 진화시켰다는 인상이 강하다. 자신의 작품의 한계점들을 아예 중요한 플롯의 하나로 만든 것 같다고나 할까. 그녀의 작품들의 가장 큰 특징이자 일종의 한계를 꼽아보라면 나는 항상 끔찍하게 선량한 주인공들이라고 생각하는데, 지금까지의 작품들에서는 어쨌건 이 선한 의도로 인한 행동들(혹은 실수들)이 정말로 파괴적인 결과를 불러온 적은 없었다. <화재 감시원>과 <둠즈데이 북>에서는 앞에서 말했듯이 시공간 붕괴라든가 인과 모순 등이 애초에 중요한 플롯의 일부가 아니었으므로 바솔로뮤와 키브린의 경험은 안타깝고 끔찍할지언정 개인적인 차원에 머무를 수 있었던 것. 그러나 <Black out>과 <All clear>에 이르면 주인공들은 자신들이 알고 있고 믿어왔던 시간 여행 이론을 뿌리부터 의심하게 되는 시간 여행 탈트 붕괴에 맞닥뜨리게 된다. 우리들의 선량함이 정말로 파괴적인 결과를 불러올 수 있는가? 역사학자들은 이미 일어난 역사를 바꿔놓을 수 있는가? 이는 전작 <개는 말할 것도 없고>의 네드와 베리티의 고민과 연장선상에 있긴 하지만 이번에는 비교도 할 수 없을 정도로 훨씬 더 위험한 분기점인만큼 한시도 마음을 놓을 수가 없다. 주인공들은 졸지에 배틀로얄이 되어버린 실습에서 살아남기 위해, 그리고 언제 어디서나 끔찍하게 헌신적이고 선량한 윌리스의 아이들답게 이미 일어난 역사의 진행경로를 바꾸지 않기 위해  발버둥을 치게 된다. 윌리스 여사는 이 작품의 영감을 911 테러 사건이 터졌을때 쌍둥이 빌딩 안의 엘리베이터에 갇혀 밖에서 무슨 일이 일어나는지 알 수 없는 채로 두려움에 떨었던 생존자들의 이야기에서 얻었다는데, 문단 끝마다 클리프 행어를 주면서 3-40년대의 영국과 2060년대의 옥스퍼드를 오가는 서술 방식을 보고 있으면 이 비유가 확 와닿는다. 2060년의 옥스퍼드 시점에서의 서술이 뚝 끊기게 되는 순간 책을 손에서 놓을 수가 없게 된다.

스포일러를 당하면 정말 재미가 없어지는 작품이라 끓는 점 얘기하기도 참으로 애매한데, 그래도 열변을 토하는 자리니까 영역별로 나누어 이야기 해본다. 

1) 역사 덕후 헤쳐모여 

엄청나게 역사에 해박한 분들은 오히려 모르겠다. 브라이오니 꾸짖는 로비의 전우처럼 저기요 여사님 그건 틀렸고요, 그건 아니고요 하면서 되려 까칠해질지도. 그러나 나처럼 역사를 좋아하되 그다지 잘 알지는 못하는 평범한 사람들, 특히 2차 세계 대전이나 런던 대공습에 특히 관심이 많은 분들은 윌리스 여사님이 끝없이 내놓는 역사 뽕을 단단히 빨 준비를 하시길. 이번에는 런던만 다루는 게 아니라 2차 세계 대전 당시의 영국 자체가 배경이라 안 나오는 게 없다. 얼트라, 블레이츨리 파크, 던커크 구조, 노르망디 상륙작전, 스파이, 세인트 폴 폭격, 앰뷸런스 운전사들, 피난민 아이들에 나올 건 정말 다 나온다. 스파이 넘쳐나는 냉전도 좋고 썩은 백조 먹는 중세도 좋지만 두들버그 떨어지는 2차 세계 대전도 뽕을 빨기엔 그만이다. 심지어 지하철 역 대피소에서 피터팬 연극도 한다..!

2)  이웃집 영웅들

: 윌리스 여사는 굳건한 성선설자고 결국 좋은 사람들이 승리하는 이야기를 언제나 꾸준히 써왔다. 그래서 사람들이 윌리스 여사의 글을 이렇게나 좋아하는 게 아닐까. 어쨌든 역사는 보는 사람의 눈에 달린 것인데 윌리스 여사님의 눈을 통해 보면 역사는 평범한 작은 영웅들로 가득한 희망적인 이야기니까. 이번에는 정말로 전시상황인만큼 특히나 이런 평범한 보통 영웅들의 활약이 더욱 두드러진다. 풀어야하는 설정이 너무 많다 보니 초반엔 바쁘게 일만 해서 마치 현지인들 도와주러 미래에서 온 브라우니 요정들처럼만 느껴져서 별 재미가 없던 주인공들도 뒤로 갈수록 정이 든다. 제약이 엄격한 것 같으면서도 지키는 애들은 하나도 없는 자유 방임형 옥스퍼드 역사학부지만 어떻게든 잘 헤쳐나왔던 과거와는 달리, 이번엔 정말이지 배틀로얄이다. 정신을 차려보면 제발 얘들에게 아무 일이 없게 해달라며 대답 없는 윌리스느님에게 빌고 있는 자기 자신을 발견하게 될 것.

3) 한밤중에 세인트 폴에서 일어난 이상한 사건

: 윌리스 여사님은 모든 작품에서 느껴지지만 추리 소설을 참 좋아한다. 반전도 많고, 한 조각 한 조각 끼워넣으면 어느새 나도 모르는 사이에 그림이 짠 완성되는 그런 식의 구성을 즐겨 사용하는데 덕분에 나는 읽으면서 고생을 좀 했지만  평소 그다지 관심이 없던 추리 소설 장르에 대한 흥미는 확실히 생겼다. <개는 말할 것도 없고>가 지금까지는 이런 추리 소설 오마쥬의 느낌이 제일 강했고, 주인공인 베리티의 입을 통해 도로시 L. 세이워즈의 피터 윔지 시리즈에 대한 애착을 드러내기도 했었는데 <Black out>과 <All clear>는 아가사 크리스티의 작품들에 대한 오마쥬가 두드러진다. 대체 역사 판타지라는 평소의 분류에 "추리"를 끼워넣어도 좋을 정도로 미스테리를 풀어나가는 느낌이 아주 강한데다가 아가사 여사가 말 그대로 전면에 등장하시니 추리 소설 좋아하시는 분들은 기대하셔도 좋다. 게다가 스파이들도 잔뜩 나온다..!

2013년 3월에 썼던 글의 끝에도 똑같은 말을 했었는데, 결국 같은 말을 한 번 더 하게 되었다. <Black out>과 <All clear>는 코니 윌리스 여사의 시간여행 시리즈의 완결판으로 안 읽으면 우리만 손해다. 그러니 어서 빨리 좋은 역자분을 만나서 한국어로 번역 출간되기를. 책의 신이시여 2016년에는 꼭 앞 작품들 절판도 풀어주시고 신간 번역본도 주십시오. 믿습니다. 북멘.

#코니윌리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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