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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인 오스틴

(6) 작품들 (스티븐턴 소설 - 오만과 편견)

엘리자베스 베넷을 제인 오스틴으로 읽어내고자 하는 욕망은 강력하고도 끈질기다. 이 책을 읽고 사랑에 빠진 독자들은 제인 오스틴이 자신의 형상대로 리지 베넷을 창조한 후 보기가 좋았노라 만족했으리라 자신하며, 너무 자신한 나머지 혐오스러운 콜린스 씨나 대책 없는 리디아 역시 그의 창조물임은 쉽게 잊어버린다. 왜 다른 주인공들을 제치고 리지 베넷이 간택 되었는지는 어렵지 않다. [이성과 감성]의 메리앤은 흥미롭지만 너무 분별이 없고, [맨스필드 파크]의 패니 프라이스는 너무 소심하며, [노생거 수도원]의 캐서린은 너무 순진하고, [설득]의 앤은 너무 차분하니까. 우리는 제인 오스틴이 리지 베넷의 모든 장점을 갖고 있되 단점은 초월한 존재라고 믿고 싶은 것이다. 하지만 찰스 디킨스가 어릴 적에 아무리 고생을 했더라도 데이비드 코퍼필드와 동일 인물이 아니고 샬롯 브론테가 로체스터 씨와 자식 낳고 잘 산 것이 아니듯이, [오만과 편견]을 제인 오스틴의 전기로 읽어내고자 하는 경향은 유혹적이나 정확하지는 않다. 사실 [오만과 편견]의 세계는 제인 오스틴이 가장 공들여 창조해 낸 가상의 세계이며, 가장 위험한 순간에도 그늘 없이 반짝거린다. 마치 현실이 끼어들 틈을 주지 않겠다고 다짐이라도 한 듯이. 그렇다면 실제 제인 오스틴에게는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었을까?


1. [첫인상] - 1796

[이성과 감성]이 원래는 [엘리너와 매리앤]이었던 것처럼 [오만과 편견] 역시 시작은 [첫인상]이었다. [첫인상]의 집필 시기에 대해서는 확실한 기록이 남아있다. [엘리너와 메리앤]을 끝낸 바로 다음 해인 1796년 10월에 집필을 시작한 제인 오스틴은 9개월 만에 [첫인상]의 초고를 끝내고 스티븐턴의 가족들과 친구들 앞에서 낭독을 했다. 이 원고 역시 남아 있지 않기에 내용은 알 수 없으나 역시 서간체로 추정되며 여기저기를 잘라냈다는 제인 오스틴의 편지 속 기록을 보면 [오만과 편견]으로 다시 태어날 때까지 상당한 수정을 거친 듯 하다. [첫인상]은 제인 오스틴이 최초로 출간을 시도했던 작품이기도 하다. 1797년 유명한 출판업자였던 아버지로부터 사업을 물려받은 런던의 출판업자 토마스 카델은 이름 모를 시골 목사가 보내 온 원고를 뜯지도 않고 그대로 돌려보내는데 이때 출간에 성공했더라면 오스틴의 작품 세계가 어떻게 달라졌을지는 아무도 모를 일이다. Declined by Return of Post. 수신자가 봉투를 채 열어보지도 않고 그대로 돌려보냈음을 의미하는 이 다섯 개의 단어를 보고 혀를 차지 않을 오스틴의 독자들이 있을까. 카델의 거절이 오스틴 부녀를 얼마나 실망시켰을지는 기록이 없기에 정확히 알 수 없다. 우리가 알 수 있는 것은 조지 오스틴이 필요하다면 출판에 드는 비용을 부담할 의향까지 있다는 내용의 편지를 동봉했을 만큼 작가로서의 딸의 재능을 믿었으며, 제인 오스틴 역시 자신의 작품을 믿었다는 것 뿐. 제인 오스틴에게 글쓰기는 단지 소일 거리에 불과했다는 말을 아직도 믿고 있다면 [오만과 편견]은 1796년에 시작되어 1813년에야 출간되었음을 기억하자. 심심풀이 삼아 쓴 글을, 그것도 한 번 거절까지 당한 후에도 10년이 넘는 세월을 기다려 출간을 할 사람이 과연 몇 명이나 있을까?


2. 오만과 편견으로

1) 친애하는 패니 버니에게

프랜시스 버니 (1752-1840)

제인 오스틴은 흔히 '모방할 수 없는' 목소리를 가졌다는 평을 받는다. 오스틴주의자들 중에서도 극렬 순수주의자에 가까운 나보다 이 말에 더 동의할 사람은 없다. 그러나 [이성과 감성]을 다룬 앞 선 포스팅에서도 얘기 한 것처럼 제인 오스틴 역시 진공 상태에서 홀로 태어난 작가는 아니었다. 그는 당대의 많은 여성 작가들을 존경하고 좋아했으며, 모방을 통해 뛰어넘고자 했는데 그 중에서도 [첫인상]의 집필과 [오만과 편견]으로의 개작에 가장 많은 영향을 준 당대의 작가는 패니 버니인 것으로 보인다. 여주인공의 무결점과 미덕을 찬양하는 남성 작가들과는 달리 현실에서 끌어낸 자연스러운 인물들을 그려보고자 했던 패니 버니는 자신의 작품에서 예쁘지는 않지만 영민한 여주인공을 도입했고 지나치게 극적인 클라이막스 보다는 좀 더 자연스러운 결말을 시도하는 등 제인 오스틴에게 많은 영향을 미쳤다. 특히 [세실리아]의 영향력은 뚜렷해서, 오만하고 뻣뻣한 귀족 도련님 남주인공과 영민하고 활기찬 여주인공의 오해와 사랑을 그린 이 작품의 마지막 챕터에서는 "오만과 편견"이라는 말이 반복해서 등장한다. 어릴 적부터 온 가족이 알아주는 패니 버니의 팬이었던 제인 오스틴이 [첫인상]의 새로운 제목을 어디에서 따왔는지는 짐작하기 어렵지 않다. 패니 버니는 인기 작가였던 만큼 당시 독자들은 [오만과 편견]의 제목을 들으면 [세실리아]에 바치는 오마쥬임을 바로 알아차렸을 것. 이렇게 당대에 잘 알려진 다른 작품을 레퍼런스로 활용하는 것은 좋아하는 작가에 바치는 존경의 표시인 동시에 제인 오스틴 본인도 앞서 나간 다른 여성 작가들처럼 대중을 사로잡을 만한 인기 소설을 쓰고자 했음을 알려주는 지표이기도 하다.


2) 베넷과 오스틴

아직 오만과 편견이 [첫인상]이던 1796년과 1797년, 오스틴 자매와 베넷 자매가 이웃이었다면 무신경한 베넷 부인은 오스틴 자매의 '딱한 사정'에 대해 떠들어 대며 자신의 운에 감사했을 것이다. 먼 친척이자 어린 시절부터 환영 받는 친구였으며 카산드라의 남편이 되어 진짜 가족이 될 예정이었던 톰 파울은 안정된 결혼 생활을 위한 돈을 벌려고 떠났던 항해에서 끝내 집으로 돌아오지 못 했으며, 제인의 마음을 사로잡았던 '아이리쉬 친구' 톰 르프로이 역시 쫓기듯 도망쳤으니. 20대의 제인 오스틴도 리지 베넷처럼 언니 카산드라를 위해, 그리고 자기 자신을 위해 콧대 높은 귀족들에게 맞서 이겼을지도 모른다는 상상은 얼마나 매력적인가. 그러나 현실의 오스틴 자매들에게는 싸워서 이길 사람들이 없었고, 싸우지 않으니 승리도 없었다. 그들에게는 유언장을 미리 작성해 작은 유산이나마 남기고 간 사려 깊은 죽은 약혼자와 어린 친구를 상처 입히지 않기 위해 조카를 쫓아버렸던 친절한 이웃이 있을 뿐이었다. 후에 제인 오스틴은 [오만과 편견]이 자신의 대표작으로 남을 것임을 예감하면서 이 작품의 지나친 밝음에 대해 장난스럽게, 그러나 반쯤은 진지하게 꼬집는다. 어쩌면 그는 삶에 대한 이해가 깊어진 원숙한 작가로서 그늘 한 점 없이 반짝이는 가상의 세계를 만들어 위로하고 또 위로 받고자 했던 10년 전의 자신을 조금은 안타깝게, 그러나 애정 어린 시각으로 되돌아보고 있었던 게 아닐까.


"샬럿이 정찬까지 하고 갔나요?"

"아니, 금방 집에 갔어. 다진 고기 파이를 만들 사람이 필요했나 봐. 하지만 빙리 씨, 저는 언제나 일을 제대로 하는 하인들을 둔답니다. 우리 애들은 그런 일을 하며 자라지 않았어요."


베넷 자매와 오스틴 자매의 차이는 여기에서 멈추지 않는다. 아버지인 베넷 씨는 한사 상속 제도에 손발이 묶여 다섯 딸들에게 재산을 물려주지는 못하지만 직업이 없이도 생활을 유지할 수 있는데 이는 그가 스펙트럼이 넓었던 조지안-섭정 시대의 젠트리 계층에서 상당히 위쪽에 속해 있었다는 뜻이다. 베넷 부인이 딸들에게 집안일을 전혀 시키지 않아도 된다는 사실에 자부심을 느낀다는 것도 이를 뒷받침한다. 베넷 자매들은 집안일을 도맡아 하는 하녀 뿐만 아니라 집사와 남자 하인도 갖고 있는데 이는 앞에서 여러 번 얘기 한 것처럼 부잣집에 운 좋게 입양 된 형제 정도를 제외하고는 모두가 일을 해야 했던 오스틴 가문과는 대조적인 모습이다. 어쨌든 지배층에 속했던 오스틴들 역시 늘 두 명 정도의 하녀를 데리고 있었지만 제인 오스틴과 카산드라 오스틴은 집안일로부터 자유로운 적은 한 번도 없었다. [오만과 편견]의 꽤 복잡한 플롯은 등장 인물들의 계급보다는 재산의 정도와 큰 관련이 있는데, 워낙 유명한 얘기인 만큼 여기서 자세하게 설명할 필요는 없겠지만 이 작품은 다아시와 리지, 그리고 빙리와 제인의 로맨스를 그리면서도 동시에 현실적 장애물을 세밀하게 그린다는 점에서 이미 상당히 혁신적인 소설이었다. 비현실적 요소를 통해 현실의 제약을 일시적으로 무시해버리는 고딕 소설이나 감상적이고 낭만적인 소설의 전례를 따르지 않고 사실주의적 접근을 고수하면서도 독자들도 납득할 만한 로맨스가 탄생할 수 있었던 것은 제인 오스틴의 천재적인 균형 감각 덕분이다.


3) 군대

제인 오스틴의 사실주의적 접근을 이야기하려면 [오만과 편견] 속 군대의 존재를 빼놓을 수 없다. [오만과 편견]을 읽으면서 왜 이렇게 군인들이 큰 비중을 차지하고 있는지 궁금해 본 적이 있는지? 나는 있다. 이는 오만하긴 해도 고매한 인격을 가졌다고 설정되어 있는 다아시 씨가 대체 왜 빙리 자매들의 비열한 뒷담화에 동참하는가와 더불어 늘 나를 어리둥절하게 했던 문제였다. 매우 평화로워 보이는 베넷 자매의 영국에는 대체 왜 이렇게 많은 수의 군인들이 항시 존재하고 있었던 것일까? 위컴의 부대는 대체 뭘 하고 있었단 말인가?


"브라이턴 근처로 옮긴대. 아버지가 여름에 우리 식구 모두를 거기 데리고 가면 얼마나 좋아! 정말 멋진 계획이 될 텐데. 돈도 거의 안 들 거고 어머니도 가고 싶어 하실 거야! 안 그러면 여름 동안 얼마나 비참하겠어!"

'그래.' 엘리자베스가 생각했다. '아주 좋은 계획이구나. 신나겠지. 우리한테 꼭 맞을 거야. 세상에! 브라이턴인 데다가 군인들 가득한 부대라니, 보잘것없는 민병대 연대 하나가 메리턴에서 한 달에 한 번씩 연 무도회만으로도 이미 엉망이 된 우리한테.'


이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제인 오스틴이 살았던 시대에 대해 알 필요가 있다. 태평성대의 영국에서 걱정 하나 없이 취미 삼아 글을 썼다는 이미지와는 달리 1775년에 태어나 1817년에 죽은 제인 오스틴은 평생 12년 8개월을 제외하고는 늘 전쟁 속에서 살았다. 아주 간략하게 정리해보자면, 1773년부터 1783년 베르사유 평화 협정이 이루어지기까지 영국은 북미 대륙의 식민지에 대한 권리 행사를 두고 미국, 스페인, 프랑스와 끝임 없는 전쟁을 치렀으며, 미국의 독립을 인정하면서 얻어진 짧은 평화 이후 1789년 프랑스에서 대혁명이 시작되자 다시금 불안한 상태가 되었다. 프랑스의 정치적 격동은 1793년 영국과 네덜란드에 전쟁을 선포하는 것으로 이어지는데, 영국은 1794년 프랑스를 무찌르지만 1796년 스페인이 전쟁을 선포해 1797년 네덜란드와 스페인에 승리할 때까지 또 전쟁을 치른다. 크고 작은 전투를 거듭하던 중에 1803년 나폴레옹이 등장하자 영국은 다시 긴 전쟁에 휘말리게 되며 스페인도 다시 참전하여 유럽을 혼란으로 몰아넣은 이 전쟁은 1805년 트라팔가 전투에서 영국이 승리하고 나서야 끝난다. 사촌의 남편이 마리 앙투아네트를 위해 일하다가 단두대에서 목이 날아갔고 세 명의 남자 형제가 군인이었던 만큼 국내외 정세를 잘 알고 있었을 제인 오스틴은 형제들의 경험을 전면으로 내세우지는 않지만 배경으로 활용해 자신의 작품들에게 사실성과 동시대성을 부여하고자 했다. 나폴레옹과 싸운 해군이었던 프랜시스와 찰스 오스틴의 삶이 [맨스필드 파크]와 [설득]에 반영된 것처럼 [오만과 편견]은 국내를 지키는 민병군이었던 헨리 오스틴의 경험에서 많은 부분을 빌려온 것으로 보이는데, 매력적인 악당인 위컴이 어느 정도 그에게 기반했으리라 추측하는 연구자들이 많다. 다아시 가문의 후원으로 대학을 다녔던 위컴처럼 헨리 오스틴 역시 1793년 프랑스와의 전쟁이 발발하기 전에는 성직자의 길을 걷고 있었는데, 주로 국내를 지키고 국민들을 통제하는 역할을 한 민병대에 자원한 이유는 나라를 지키기 위해서라기보다는 사교 생활의 보장과 직업 안정성 때문이었던 것으로 보인다. 아버지의 교구를 물려받을 수 있었던 형 제임스와는 달리 오로지 자신의 매력과 능력만으로 앞길을 개척해야 했던 헨리 오스틴의 처지는 부잣집의 상속자인 다아시와 대조되는 불안정한 위컴의 처지와 비슷한 면이 있다. [오만과 편견]에서 붉은 군복을 멋지게 차려 입고 동네 아가씨들과 신나게 연애를 했던 위컴의 민병대가 여름이 되자 메리턴을 떠나 바다 근처의 휴양지인 브라이턴으로 떠나게 되자 키티와 리디아 베넷이 실망하는 장면은 실제 헨리가 속해 있었던 옥스퍼드 민병대의 행적을 그대로 따른 것으로 적당히 가상의 공간이나 시간대를 고른 게 아니라는 점에서 제인 오스틴의 얼마나 정확성을 중시했는지 알 수 있다. 바다에서 싸웠던 해군과는 달리 국내에서 폭동을 진압하는 등 군대의 관리 뿐 아니라 민란을 방지하는 역할을 했던 민병대는 [노생거 수도원]에서도 배경으로 등장한다. 

 제인 오스틴의 사실주의적 접근은 여기서 멈추지 않는다. [이성과 감성]을 다룬 앞 포스팅에서 제인 오스틴이 메리 울스톤크래프트의 존재를 몰랐을 리가 없다는 얘기를 했었는데, 시대를 앞서간 페미니스트였던 메리 울스톤크래프트는 1792년 자신의 저서 [여성의 권리옹호]에서 하는 일 없이 허세만 부리며 주둔한 마을의 젊은 여성들을 유혹하는 "빨간 코트" 민병대의 부도덕성을 강하게 비판한다. 형제와 가족, 아버지 모두가 [여성의 권리옹호]에서 가장 직설적으로 비난 받는 직업군에 속해 있었던 제인 오스틴이 이 책을 읽고 어떻게 느꼈는지는 정확하게 알 수 없지만 그 역시 가장 사랑하는 오빠 헨리의 경험을 가져다 쓰면서도 민병대의 행실을 바람직하게 그리지는 않았다는 점은 주목할 만하다. 위컴은 매력적이고 일면 동정할 만한 점도 있지만 그의 행실은 분명히 경솔하고 부도덕하며 미숙한 어린 여성들을 이용하고 떠나 버린다는 점에서 매우 위험하기까지 하다.

  * 시공사에서 이번에 새로 내놓은 개정판에서는 민병대의 주둔 이유를 나폴레옹의 위협으로 설명해 놓았는데 [첫인상]의 초고가 1797년에 집필 되었고 헨리 오스틴이 1801년 민병대를 그만둔 것을 생각해보면 [오만과 편견] 속 민병대는 나폴레옹보다는 프랑스 혁명과 스페인과 프랑스와의 전쟁 때문에 혼란스러워진 국내 정세를 통제하기 위한 역할을 했을 가능성이 더 높다. 실제로 1700년대 후반에는 전쟁 때문에 높아져만 가는 세금에 불만을 가진 시민들이 폭동을 일으켰다가 민병대에게 총살된 기록이 남아 있다. 


3. 피츠윌리엄 + 다아시 vs 베넷

다시 한 번 이름이다. 앞에서 제인 오스틴이 어떻게 당대 유명인들의 이름을 빌려와 동시대 독자들의 흥미를 불러 일으키고 그 이름에 얽힌 역사를 활용하고자 했는지에 대해 얘기했었다. [오만과 편견]의 이름들도 마찬가지로 매우 신중하고 의도적으로 선택되었는데 모든 사람을 다 이야기하면 책 한 권이 나올 테니 미스터 다아시에 초점을 맞춰보자. 당연한 말이지만 미스터 다아시의 '다아시'는 이름이 아니라 성이다. 이쯤에서 열렬한 오스틴 팬이라면 "이름은 피츠윌리엄!" 이라고 외치게 될 텐데 이 '피츠윌리엄'이라는 이름은 다아시의 사촌 '피츠윌리엄 대령'(그들은 그러니까 동명이인이다.) 에서 다시 한 번 반복되어 독자들에게 확실하게 각인된다.  


피츠윌리엄 + 다아시 조합에 대한 설은 너무나 여러가지가 나올 수 있다. 우선 "피츠윌리엄"과 "다아시"는 모두 영국에서 가장 오래 되었고 명망 있는 가문인 "웬트워스" 가문의 분파였다. 웬트워스 가문과 어머니 쪽으로 멀게나마 연이 있었고 역사를 좋아했던 제인 오스틴은 어릴 적부터 이 가문에 큰 흥미를 보였는데, 열 살 때 목사인 아버지가 관리하던 결혼 명부에 자신의 미래 남편 이름으로 "헨리 프레데릭 하워드 피츠윌리엄"이라는 거창한 이름을 적어 놓기도 했다. (한 쪽으로 쏠리는 법이 없는 균형과 아이러니의 대가 답게 그는 또 다른 신랑 이름으로는 평범한 "잭 스미스"를 택했다) 그러나 어린 제인 오스틴의 마음 속에서 멋지고 영향력 강한 이름의 위치를 차지 하고 있었던 "피츠윌리엄"은 그가 풍자를 자유자재로 활용하게 된 성인 작가가 된 무렵에는 귀족들의 오만함이라는 부정적인 뉘앙스를 띠게 되었다.


불행히도 외아들로서, (그리고 동생이 태어나기 전까지는 오랫동안 외동이었죠) 부모님은 저를 응석받이로 키우셨습니다. 좋은 분들이셨지만(특히 선친은 정말로 너그럽고 인정 많은 분이셨습니다), 제가 우쭐거리고 가족 바깥의 누구도 신경 쓰지 않고 세상을 우습게 보도록, 아니 적어도 제 분별력과 가치에 비하면 세상의 그것들을 우습게 보아도 좋다고 허락받은 셈이었습니다. 그렇게 격려받고 거의 그렇게 배웠습니다. 


이름 자체의 분석에 좀 더 주목한 연구자들은 다아시가 자신의 오만한 성격이 부모님의 양육 탓임을 암시하면서도 아버지는 긍정적으로 말하는 것을 두고 어머니 쪽에서 물려받은 "피츠윌리엄"이 그의 부정적인 면을 담당한다고 보기도 한다. 다아시는 사실 "미스터"라는 호칭을 보면 알 수 있는 것처럼 본인이 귀족의 호칭을 물려받진 않았는데(호칭을 물려 받을 정도의 귀족은 수가 드물었고 만약 그랬다면 그는 미스터가 아니라 Sir 같은 별개의 호칭이 붙게 된다), 그렇기에 그의 귀족적 뿌리에 대한 자부심은 이모인 캐서린 숙부인과 어머니 쪽에서 왔을 가능성이 높다. 그리고 10살 소녀 시절에는 이 이름의 귀족적 화려함에 매료되었던 제인 오스틴은 더 이상 이것을 장점이 아닌 단점으로 보고 있는 것이다. 또한 "피츠윌리엄"에 귀족적 자부심을 가진다는 것은 그 자체로 다소 아이러니한데, "피츠"는 사생아라는 뜻을 가지고 있다. 정복자 윌리엄을 따라 영국 땅에 침입한 기사들이었다는 역사적 뿌리를 가진 "피츠윌리엄"들은 왕의 곁에서 함께 싸운 남성적이고 공격적인 영웅이라는 느낌을 가진 동시에 "윌리엄의 사생아"라는 뜻이니, 엄밀히 말해 정통성이 있는 고귀한 피라고 보긴 힘든 것이다.


 반면 그가 아버지 쪽에서 물려 받은 "다아시"는 헨리 8세 시대에 그의 무자비한 종교 개혁에 맞선 반정부 봉기(은총의 순례, Pilgrimage of Grace)에서 시민들과 수도사들의 편에 섰다가 사형 당한 1대 다아시 남작을 연상하게 한다. (제인 오스틴이 튜더 가문을 싫어하고 스튜어트 가문을 좋아했다는 것은 이미 말한 적이 있다) 즉 피츠윌리엄 다아시는 충돌하는 두 이름을 가진 채 자신도 모르고 있지만 은총을 찾아 헤매고 있는 것이다. 그렇다면 이 은총은 어떻게 찾을 수 있을까? 오만하고 공격적인 피츠윌리엄은 어떻게 해야 은총을 받고 고결한 다아시가 될 수 있을까?


제가 당신의 부족한 사회적 배경을 기뻐할 수 있다고 생각합니까? 나보다 현저히 뒤지는 조건을 지닌 사람과 맺어지는 걸 스스로 축하할 수 있다고 생각합니까?


답은 당연하게도, "베넷"에 있다. 다아시가 그토록 얕잡아 보았던 베넷들은 그 경박함과 어리석음에도 불구하고  "축복 받은", "은총 받은" 사람들이다. "Bennet"은 프랑스의 일부였던 노르망디 지역에서 온 이름으로 "축복 받은"이라는 뜻을 가진 "베네딕트"의 변형이다. 또한 "엘리자베스"는 영국에서 가장 강력했던 여왕의 이름이기도 하니 정통성 없고 공격적으로 영국 땅에 쳐들어왔던 오만한 피츠윌리엄은 축복받은 여왕 엘리자베스 베넷을 만나 구원 받고 나서야 제대로 된 다아시가 될 운명이었던 것이다. 한 가지만 더 재미있는 얘기를 하자면 베넷들의 가장 든든한 후원자인 외삼촌 부부의 이름 "가드너"는 "정원사", 즉 최초의 정원사들이었던 "아담과 이브"를 떠올리게 한다. 그들은 런던에서 상업에 종사하는 평범한 중간 계급으로 처음에는 다아시와 빙리 자매의 노골적인 비웃음을 사지만 다아시는 "그레이스 처치"에 사는 "가드너"들의 적극적인 안내와 도움을 통해서야 마침내 베넷가와 연결 되며 엘리자베스 베넷과의 오해를 풀고 그의 사랑을 얻게 되는 것이다.  


4. 출간과 비평

[오만과 편견]은 역시나 [이성과 감성]을 출판한 토마스 에저튼에 의해 세상에 나오게 된다. 다만 작가가 인쇄와 홍보에 드는 비용을 상당 부분 부담해야 했던 [이성과 감성] 때와는 달리 [오만과 편견]은 토마스 에저튼 쪽에서 출간 비용을 부담했으며 저작권료로 제인 오스틴은 150 파운드를 원했지만 110 파운드를 받아들인다. 1813년 [이성과 감성]의 저자의 작품이라는 홍보 문구를 달고 출간 된 [오만과 편견]은 [이성과 감성]보다 더 높은 값이 매겨졌으며 엘리자베스 베넷이라는 새로운 유형의 여주인공을 칭찬하는 호의적인 평들이 쏟아졌다. 익명으로 출판되었지만 이미 작가의 정체를 알고 있었던 친구와 이웃, 가족들 모두 이 발랄한 작품을 매우 좋아했고 헨리 오스틴은 이 소설이 너무 영리하게 쓰여져서 여성의 작품이라고는 믿을 수 없다는 말을 들었다. 제인 오스틴 본인 역시 엘리자베스 베넷을 조금이라도 좋아하지 않는 사람은 견딜 수 없을 것 같다는 말을 남겼으며 출판 당시에 세상에 나가 박수를 받지는 못 했지만 이 시기에 언니에게 보낸 편지는 '소중한 나의 자식'이라고 부르면서 10년이 넘는 세월 동안 품고 있었던 작품을 내놓은 작가의 뿌듯함과 기쁨이 넘쳐 난다.


그러나 제인 오스틴 작품에 대한 반응을 이야기할 때 기억해야 할 것은 그의 어떤 작품도 그를 살아 생전 유명 작가로 만들어주지는 못 했다는 사실이다. [이성과 감성] 때와 마찬가지로 [오만과 편견]은 이 소설의 리얼리즘과 신선함을 알아 본 몇 명의 수준 높은 독자들에게 열렬한 지지를 받았지만 이것이 문학계에서의 성공으로 이어지지는 못 했다. 제인 오스틴의 작품에 대한 전문적인 최초의 문학 비평은 [엠마]가 세상에 나온 후에야 등장하며, 그마저도 그의 작품의 우수성을 제대로 알아보았다고 하기는 힘들다. 그러나 [오만과 편견]의 우수함은 분명히 제인 오스틴에게 몇몇 문을 열어 주었으며 특히 쉐리단 같은 당대의 뛰어난 작가나 윌리엄 기퍼드 같은 영향력 있는 비평가의 눈을 사로잡았다. 냉철하고 신랄한 비평가였던 윌리엄 기퍼드의 극찬은 바이런의 출판가였으며 아직까지도 영국 문학계에서 가장 유명한 인물 중 한 명인 존 머레이와의 인연으로 이어지는 결과를 낳기도 했다. 그는 제인 오스틴의 작품을 소개받기 이전에는 소설 장르를 경멸하여 손도 대지 않으려고 했던 사람이었다. 존 머레이와 제인 오스틴에 관한 이야기는 [엠마]에서 자세하게 풀어 볼 예정.


[오만과 편견]은 내 기준에 있어 빼거나 더할 것 없이 완벽한 구조를 갖춘 소설이며 너무 오래 전부터 좋아했기에 짧게 말할 수 없으리라는 건 알고 있었지만 정말로 만자가 넘어버릴 줄이야. 이나마도 많이 줄인 건데도 역시 어릴 때부터 좋아했던 작품은 어쩔 수가 없나 보다. 너무 길어져서 페미니즘 비평은 다루지 못 했는데 [오만과 편견]을 페미니즘 관점에서 읽기는 워낙 잘 알려진 방식이기도 하고 나는 이 관점을 다음에 소개할 [노생거 수도원]에서 좀 더 집중적으로 적용해보고자 한다. [노생거 사원]을 마지막으로 10대 후반에 시작된 제인 오스틴 작품 활동은 한 막을 내리고 초튼으로 옮겨간 후에 새롭게 시작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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