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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리와 아서

용감한 동업자들

“괜찮다면 당장 와주게. 괜찮지 않아도 당장 와줘.”


이 간결한 전갈을 보낸 사람이 셜록 홈즈임은 잊을 수가 없는데 정작 이걸 받은 왓슨이 어떻게 반응했는지는 늘 잘 기억 나지 않는다. 평소 행적으로 미루어 보아 당연히 달려갔겠거니, 할 뿐. 그러다 우연히 [기어 다니는 남자]를 다시 읽게 되면 그를 쉽게 잊었다는 사실에 죄책감마저 든다. 왓슨은 너무 좋은 친구이기 때문이다. 이 사람 좋은 의사는 갑작스러운 호출을 귀찮아하기는커녕 스스로를 이렇게 평가한다.


이렇게 뒤로 가면서 우리의 관계는 기이해졌다. 홈즈에게는 몸에 밴 버릇이 몇 가지 있었는데, 나도 그 버릇들 중 하나가 된 것이다. 바이올린, 섀그 잎담배, 오래된 검정 파이프, 색인집, 그리고 그 밖의 잡동사니처럼 나는 홈즈의 곁을 지키는 익숙한 물건 같은 존재였다. (...) 내 느려터진 정신 기능 때문에 짜증이 날 때면, 그로 인해 홈즈의 섬광 같은 직관과 인상이 더욱 생생하고 빠르게 번뜩이는 경우도 있었다. 우리의 협력 관계에서 내가 맡은 작은 역할은 이런 것이었다.


이래서야 말을 할 줄 아는 가구나 다름없다. 게다가 지체 없이 달려온 보람도 없이 홈즈는 오래된 친구를 곧바로 환영하지도 않는다.


내가 베이커 스트리트에 도착해서 보니 홈즈는 안락의자에 무릎을 세워 웅크리고 앉은 자세로 입에 파이프 담배를 물고 미간을 찡그린 채 생각에 잠겨 있었다. 까다로운 문제를 풀기 위해 고심하고 있는 게 분명했다. 홈즈는 평소 내가 앉는 의자를 손으로 가리켰지만, 그 후 30분 동안은 내 존재를 잊은 듯 생각에만 몰두했다.


한 가지 덧붙이자면, 이 장면의 시간적 배경은 일요일이다. 그것도 일요일 저녁. 물론 왓슨은 아무리 봐도 본업에는 큰 흥미가 없어 보이고 툭하면 병원 문을 닫지만 어쨌든 의사고, 아무리 개인 병원 의사라도 출근은 해야 할 텐데. 황금 같은 주말 저녁에 멀뚱히 남이 생각하는 모습만 지켜보고 있어도 화가 나지 않으려면 대체 얼마나 성격이 좋아야 할까. 워낙 홈즈의 방식에 익숙해졌기 때문이라고 볼 수도 있지만 사실 처음부터도 왓슨은 늘 이런 식이었다. 천성적으로 너그러운 사람인 것이다. 내 방 와이파이가 5분만 안 잡혀도 분통이 터져서 바닥을 구르는 나로서는 짐작도 되지 않는다.  아무리 창작이라도 상상만으로는 안 되는 일도 있다. 셜록 홈즈 시리즈를 읽으면 읽을수록 그런 확신이 든다.  존 왓슨 박사의 관대함은 분명히 작가 본인 성격의 일부임이 틀림없다고. 그러나 다른 사람도 아니고 셜록 홈즈의 아버지를 이야기하는 자리인 만큼 짐작으로 대충 만족할 수는 없는 노릇. 여기 확실한 증거를 제시한다. 인종적 편견으로 인해 억울한 누명을 쓴 변호사 조지 에달지*가 아서 코난 도일 안의 셜록 홈즈를 불러내기 13년 전, 그 안의 왓슨에게 먼저 구원을 요청한 사람이 있었다. 때는 1893년 2월, 장소는 영국. 아서 코난 도일은 고향 스코틀랜드에서 성공적인 순회강연을 마친 뒤 셜록 홈즈의 유명한 전갈만큼이나 모호한 메시지를 받고 곧장 서퍽 주로 달려간다. 발신자인 친구는 가족에게 닥친 비극과 심한 스트레스로 인해 건강이 매우 악화된 상태였지만 다행히 이 이야기는 죽음으로 끝나지는 않는다. 주로 지미 혹은 제이미라고 불렸지만 아서 코난 도일에게는 늘 '배리'였던 이 친구는 무사히 건강을 회복해 후에 자라지 않는 소년, 피터 팬을 세상에 등장시킨다.


알라카베리스
알라카베리스

 160cm의 자그마한 체구에 속을 쉽게 드러내지 않는 성격의 J.M. 배리와 190cm에 가까운 건장한 체구에 적극적이고 활발했던 아서 코난 도일은 외모와 기질의 차이에도 불구하고 죽이 잘 맞는 친구였다. 스코틀랜드 출신으로 에딘버러 대학 동기*이기도 한 두 사람은 정작 고향에서는 만난 적이 없지만 비슷한 시기에 런던으로 건너와 공통의 지인과 친구들을 갖게 된다. 그들 중 한 명이었던 [보트 위의 세 남자]로 유명한 작가 제롬 K. 제롬이 1888년 창간한 잡지 [The Idler]에 함께 기고하며 본격적으로 시작된 두 사람의 인연은 1891년 J.M. 배리가 아서 코난 도일에게 자신의 크리켓 팀 ‘알라카베리스’*에 합류를 권하면서 더욱 깊어진다. 게임을 좋아했던 J.M. 배리가 친한 작가 및 기자 친구들을 불러 모아 만든 ‘알라카베리스’ 팀의 실력은 형편 없었고 덕분에 경기는 늘 흥겹게 엉망진창이었지만 거의 모든 스포츠에 능했던 아서 코난 도일만큼은 예외였다고. J.M. 배리는 ‘실력 없는 예술가일수록 크리켓에는 뛰어나다’는 이론에 맞지 않는 유일한 사례가 아서 코난 도일이라는 칭찬을 남겼으며, 아서 코난 도일 역시 자신의 자서전에 ‘알라카베리스’에서의 활약을 자랑스럽게 기록해두었다.


 고향 스코틀랜드에 대한 애정과 크리켓에 대한 열정을 공통 기반으로 우정을 쌓아가던 두 사람에게 1893년은 시련의 해였다. 시작은 위에서 이야기한 J.M. 배리의 다급한 전보였다. 이 전보를 보내기 몇 개 월 전 J.M. 배리는 유명한 오페라 연출가 리차드 도일리 카트와의 만남에서 아이디어를 얻어 오페라 대본 집을 쓰겠다는 결심을 하게 된다. 이론상으로는 완벽한 만남이었다. 리차드 도일리 카트는 당시 수많은 히트작을 함께 만들었던 동업자인 길버트와 설리번 두 사람과 결별한 상태라 새로운 재능을 찾고 있었고 J.M. 배리는 1891년 [The Little Minister]로 극장에서 대 성공을 거둔 유망주였다. 그러나 양쪽 모두 확신에 가득 찬 상태로 시작한 오페라 [Jane Annie]는 곧 난항에 부딪힌다. 문제는 한 두 개가 아니었다. 우선 J.M. 배리는 카트에게 호언 장담을 한 지 얼마 되지 않아 자전적인 내용을 다룬 소설 [Sentimental Tommy]의 구상에 사로잡히게 된다. 게다가 정작 작업을 시작하고 보니 오페라 가사와 연극 대본은 당황스럽게도 전혀 다른 장르였으며, 아끼던 여동생의 약혼자가 갑작스럽게 사망하는 비극까지 닥치게 되자 끈질긴 일 중독자였던 J.M. 배리로서도 친구인 아서 코난 도일에게 구원 요청을 보낼 수 밖에 없었던 것.


 아서 코난 도일은 후에 회상하기를, 플롯은 이미 거의 완성된 상태였던 [Jane Annie]를 읽어보는 순간 불길한 예감에 휩싸였다고 한다. 그러나 높은 위험에도 불구하고 평소 높게 평가했던 재능 넘치는 친구의 딱한 사정을 외면할 수 없었던 그는 선뜻 공동 저자로서 짐을 나눠지기로 한다. 그의 관대함은 상대를 가리지 않아 J.M. 배리는 [Jane Annie]의 리허설 기간 내내 자신의 친구가 늘 무대 뒤 어두운 곳에서 각본 수정을 거듭하고 있었다는 기록을 남겼다. 마지막 순간까지 작품을 어떻게든 구해 내려는 절박한 시도였다기 보다는 역시나 특유의 관대함에서 우러나온 행동이었다. 아무리 작은 역을 맡은 배우라고 해도 자신의 분량이 적다고 걱정하는 모습을 보면 마음이 아팠던 그는 결국 모두에게 대사를 더 주기 위해 애를 썼다고. 그의 너그러움은 작품이 끝난 후에도 계속해서 이어진다. [Jane Annie]가 조지 버나드 쇼*의 신랄한 조롱 속에서 힘없이 막을 내리자마자 J.M. 배리는 자신의 소설 [A Window in Thrums]의 여백지에 [동업자들]이라는 제목의 셜록 홈즈 패러디를 써 보낸다. 아서 코난 도일과 J.M. 배리임이 분명한 두 명의 작가들이 자신들이 합작한 오페라가 실패하자 셜록 홈즈를 찾아와 원인을 밝혀 달라고 의뢰한다는 내용의 이 짧은 단편은 아서 코난 도일의 자서전에 최초로 실렸는데, 실패 앞에서 의연한 친구의 기백을 높이 사며 지금까지 나온 셜록 홈즈 패러디들 중 최고의 작품이라는 소개 글이 붙어있다. 자서전이 출간된 1925년에 아서 코난 도일과 J.M. 배리는 강신론에 대한 의견 차이* 로 인해 예전처럼 가깝지는 않았다는 사실을 생각해보면 속이 좋다고 해야 할지, 아니면 대범하다고 해야 할지. 나는 그냥 합쳐서 '왓슨적'이라고 하고 싶다. 평생 뭔가를 굳게 믿었고 그 신념을 지키기 위해 싸웠던 아서 코난 도일은 엉뚱한 것도 곧잘 믿었으며 느긋한 겉모습과 고집 센 성격이 혼합된 복잡한 사람이었지만 왓슨의 가장 좋은 면인 관대함 역시 분명히 그의 일부였던 것이다.  


  J.M. 배리는 살면서 총 3편의 셜록 홈즈 패러디를 썼는데 [동업자들]는 집필 시기로 보자면 두 번째 작품이지만 아서 코난 도일의 자서전에 실리기 전에는 출간되지 않아 가장 마지막으로 세상에 등장하게 되었다. 나머지 두 편의 패러디는 배리 본인이 주인공으로 등장해 셜록 홈즈의 추리 방식을 사용해 선수를 치자 홈즈가 분개한다는 내용의 [셜록 홈즈와 보낸 저녁]* 그리고 레인바흐 폭포에서의 홈즈의 죽음의 범인이 왓슨으로 몰린다는 내용을 당시 황색 언론의 센세이셔널한 보도 방식으로 묘사한 [고인이 된 셜록 홈즈]이다. 이 두 작품은 다음에 기회가 되면 소개하기로 하고, 이번에는 [동업자들]만 옮겨 보았다. J.M. 배리의 셜록 홈즈 패러디들은 국내에 번역된 것이 있는지는 나도 잘 모르겠지만 원작은 모두 다른 패러디들과 함께 앤솔로지로 묶여 출간되어 있다. 이북도 있으니 관심 있는 분들은 [Sherlock Holmes Victorian Parodies and Pastiches: 1888-1899]나 [The Big Book of Sherlock Holmes Stories]를 찾아보면 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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