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콜럼버스

 내 칭찬을 스스로 해야겠다. 나는 더 나은 배우가 되어가고 있다. 좋은 연기를 해 낼 수 있게 되었다. 그리고 내 커리어가 물론 아시안 배우 치고는 끝내주긴 하지만 그래도 내 능력을 최대한 발휘할 기회를 받아 왔다고는 말할 수 없다. 내 피부색과 뭔가 관련이 있겠지. 하지만 이 업계에서 나는 더 많은 것을 할 수 있다고 느낀다. 드디어 연기에도 자신이 생기기 시작했고 그런 만큼 더 도전이 될 만한 작품들을 하고 싶다. 


 2016년 7월 뉴욕 매거진 인터뷰에서 존 조가 한 말이다. 이걸 보고 영화 [콜럼버스]는 꼭 보겠다고 결심을 했다. 존 조가 약 5분 정도 나온다는 이유로 [토탈 리콜] 리메이크를 극장에서 두 번이나 봤을 정도로 열성적인 팬으로서 별로 새삼스러울 것도 없는 결심이었지만 이번에는 왠지 느낌이 달랐다. 존 조의 태도가 그랬다. 할 수 있는 시기에 하고 싶은 작품을 만나고 싶다는 강한 열망이 느껴졌다. 좀 더 후에 나온 [콜럼버스] 홍보 역시 이런 결심을 더욱 굳히게 했다. 존 조는 [콜롬버스]를 굳게 믿고 있었는데, 역시나 자랑스러워했던 [해롤드와 쿠마]나 [스타트렉] 때와는 또 다른 차원의 굳건한 자부심이었다. 게다가 나는 얼마 전 티비 쇼 [셀피]를 보지도 않고 평가 절하 했다가 크게  후회한 적이 있기에 ([셀피]를 1시즌만에 종영시킨 abc 관계자 분들 밤에 잠은 잘 주무시는지..? 부디 회개하십시오.) 이번에는 각오가 달랐다. 존 조의 작품에 대해서 존 조만큼 잘 아는 사람은 없다. 그 믿음을 가슴에 새기며 나는 새벽 일찍 일어나 전주로 달려갔다. 

 결론부터 말하자면 존 조가 맞았다는 말을 할 수 있어서 얼마나 기쁜지 모르겠다. [콜럼버스]는 야심이나 재능의 부족을 "담백"한 취향과 혼동하는 인디 영화가 아니며, 자기 자신에게 과도하게 몰입해 있는 젊은 백인들에게 모든 관객이 자연스럽게 이입하기를 기대하지도 않는다. 사실, [콜럼버스]는 이런 경향으로부터 최대한 멀리 떨어져 있다. 영상 예술가로서 이름을 알린 코고나다 감독은 데뷔작에서 자신만의 비전을 스크린으로 옮기겠다는 야심을 전혀 숨기지 않으며 이를 위해 완벽한 배경을 선택했다. 인디애나주의 콜럼버스는 유명한 현대 건축물들로 가득한 동시에 그 건물들 속에서 힘겹게 불경기를 헤쳐나가고 있는 사람들이 함께 존재하는 공간으로 -존 조의 표현을 빌리자면- 사막 속의 오아시스처럼 뜻밖의 아름다움으로 가득하다. 코고나다 감독은 이 현대 건축물의 메카의 아름다움을 한껏 드러내면서도 그 속의 사람들의 삶을 미화하지는 않는 균형 잡힌 시각으로 소도시의 두 얼굴을 조명한다. 주인공인 진(존 조)과 케이시(해일리 루 리처드슨)를 그리는 방식 역시 사려 깊으면서도 거리감이 있다. 영화는 소원한 관계의 아버지가 쓰러진 탓에 갑자기 낯선 곳에서 하릴없이 기다리게 된 진과 마약 중독자인 어머니를 돌보느라 고향을 떠날 수 없는 케이시를 섣불리 동정하는 대신 두 사람이 아름다운 림보에서 자신의 시간을 다할 때까지 조용히 기다려준다. 일종의 업 닦기가 연상되는 이 시간 동안 두 사람 사이에서 피어나는 우정은 자연스러우면서도 두 배우의 조용한 카리스마 덕에 눈을 뗄 수 없게 만드는 긴장감으로 관객을 사로잡는다. 


 [콜럼버스]는 진과 케이시에게 마음 속의 응어리나 분노를 숨김 없이 드러내면서 카타르시스를 느낄 기회를 주지 않는다. 두 사람은 공감과 동정에서 성적인 관계로 발전해 서로에게 위안이 되어주지도 않는다. 대신 그들은 함께 콜럼버스를 걸어 다니면서 건축물들을 구경하고 건축가들이 자신의 건물들에 불어넣고자 했던 치유의 힘에 대해 이야기를 나눈다. 케이시가 19-20살이고 진은 중년 남성임을 생각해 볼 때 두 사람의 사이가 플라토닉한 우정에 가깝게 그려지는 설정은 매우 적절하게 느껴진다. 이런 건 중요하지 않다고 말하면서 더 이상 우리 스스로를 속이지 말자. 두 사람이 연인 관계가 되었더라면 중년 남성인 진이 자신의 상처를 치유하기 위해 어린 케이시를 이용하거나 착취하는 것처럼 보일 수 밖에 없었을 테고, 그랬다면 영화는 상당히 끔찍해졌을 테니까. [콜럼버스]는 의도적으로 느껴질 만큼 이 함정을 명확하게 피해간다. 존 조의 진은 한국에서 쉴 새 없이 걸려오는 상사의 전화를 받으며 심한 압박감을 느끼고(이 영화에서 존 조의 한국말은 상당한 수준이다!), 늘 소원했던 아버지를 사랑할 수 없어 고통스러워하지만 어린 케이시가 젊음의 힘으로 자신을 "치유"해주기를 기대하지 않는다. 그는 케이시의 안타까운 사연을 듣고 위로를 건넬 때도 결코 선을 넘지 않으며, 콜럼버스를 떠나기를 권하면서도 자신이 주제넘게 남에게 충고를 할 처지가 아님을 잘 알고 있다. [콜럼버스]에는 아주 재밌는 장면이 있는데, 어머니가 다시 마약 중독에 빠졌다는 걱정에 속을 태우는 케이시가 차 헤드라이트 앞에서 춤을 추며 자신의 울분을 표현하는 동안 진은 맥주를 마시고 조수석에서 곯아 떨어진다. 나는 이 장면이 두 사람의 관계를 완벽하게 요약한다고 생각했다. 내면에 각자의 문제를 안고 있는 낯선 두 사람. 문제를 함께 해결할 수는 없지만, 한 사람이 미친 듯이 춤을 추는 동안 다른 사람이 함께 있어준다면 - 비록 조수석에서 곯아 떨어지는 형태로라도 - 조금은 덜 외롭지 않은가 하고. 혼자 있을 때만 감정을 드러내는 진이 유일하게 응석을 부리는 대상은 아버지의 제자이자 자신의 첫사랑이었던 연상의 매력적인 여성(파커 포시)이며 케이시는 결국 이 둘의 도움을 받아 콜럼버스를 떠나게 된다. 어른의 미소로 어린 친구를 떠나보낸 진은 남는다. 아버지를 위해서. 또 자신을 위해서. 이제는 가이드가 되어 줄 케이시는 없지만 그의 치유는 계속될 것이다. 아름다운 콜럼버스에서. 

 

 영화를 보기 전에는 나는 내가 존 조에게 이런 역이 더 빨리, 그리고 더 자주 돌아왔어야 한다고 외치면서 극장을 나오게 되리라 예상했다. 존 조 주연 영화나 티비 쇼를 보면 늘 그래왔듯이. 하지만 보고 나서는 마음이 달라졌다. 연기 실력은 나이와 상관이 없다지만 [콜럼버스]에서 존 조가 보여준 어른의 모습은 성숙한 배우가 아니고서는 불가능했을 것. 모든 일에는 때가 있다는 경구는 현상을 유지하고 싶은 사람들이 너무나 즐겨 내세우는 변명이기에 늘 몸소 부딪혀 변화를 이끌어 온 존 조에게는 어울리지 않는 말이지만, 이번 만큼은 써도 좋을 것 같다. [콜럼버스]는 가장 적절한 때에 그를 찾아왔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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